3. 시간으로 만드는 '행함의 자리'(1)
3. 시간으로 만드는 '행함의 자리'인간이 범죄한 후에 모든 면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을 공격한다. 하나님의 율례나 법도나 말씀이나 언약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홀로 달성해 내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자들이 아니라 거침없이 대드는 존재로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런 바벨탑 건립으로 처음 드러난 성향은 '자기 이름내기'이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자기 이름내기'란 모든 의미성을 인간 존재성에 두겠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가치 규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존재함을 드높이 다질 수 있느냐 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은 자존심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열심으로 인간들의 자존심을 부수는 식으로 만물이 움직인다는 사실만을 현실로 보신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모든 피조물의 대한 권리 행세를 마음껏 하신다. 더 이상의 현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이름내기' 성향은 '존재→인간→시간→역사→구속사'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내막을 쏟아내고 있다. 어쨌든 자기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이 점을 현실 규정의 핵심으로 간주해 달라고 신에게 항변할 참이다. 인간의 존재성을 배제하고 하나님 쪽에서 구원사역을 시도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신의 영광을 위하든 무엇을 하든 서로의 존재를 피차 인정해주시면서 그로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인간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인간들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서 그 인간을 통해서 구원이 성취되도록 하므로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재성이 의미를 갖추는 식으로 일을 하시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신앙은 나의 존재 증명이 아니다. 신앙이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었다. 신앙은 오직 언약 안에만 담겨 있었다. 즉 언약의 하나님께서 언약을 두고서 비언약 세력과의 거룩한 전쟁을 치르면서 그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이 신앙이다. 언약 안에는 오직 언약이 성취자 되시는 분만 계시다. 그 분의 신앙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이로서 언약 전쟁에 초대를 받은 자들에게만 그 분의 신앙의 지배 안에서 그 분에 대한 신앙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자신이 행함으로 주어진 신앙이 아니라 메시야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허락 받은 신앙을 선물로 받았기에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자기 자랑을 할 수 없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하나님이 친히 벌리시는 전쟁은 종말에 와서 완전히 본격화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름'으로 설쳐대는 모든 자존심을 사정없이 공격하신다. 왜 인간의 이름이 공격받아야 하느냐 하면 인간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와 거룩과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벌리시는 전쟁은 인간의 이름을 겨냥해서 '구속사→역사→시간→인간→존재' 라는 과정을 뒤덮으면서 따라오며 공격하신다. 존재의 궁극적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도 아니며 그저 이 세상이 쳐놓은 역사 속에 등장했다 점멸된 모든 존재의 재등장과 임시적 보존성에 불과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시간도 그 인간과 함께 사라진다. 시간은 곧 모든 인간에게서 떠난다는 것을 보여준다.이처럼 세계는 인간이 봤을 때 부정성(否定性)을 지니고 있음을 시간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들의 시간 본성은 자신들의 구원에 앞서 '시간 구원성'에다 자신을 맡긴다. 즉 사라진 과거 속에서 자신에게 뭔가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건들을 제멋대로 골라 배치해놓고서는 그것으로 자기 구원을 위한 간증거리에 해당되는 구속사를 만들어 놓고 그 다음 작업으로 그 시간 안에 있는 모든 부정성을 제거하므로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보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신의 자리는 '존재의 보편성'으로 마감 처리된다. 즉 존재자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부정성을 제거해서라도 종국적으로 그 존재를 받아주신다는 희망 같은 것이 서려있는 아이디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해서 구원해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므로 만약 사랑의 대상이 상실되는 그런 결함이 생겨버리면 (예를 들면 가롯 유다의 배반 같은 것) 그 책임도 가롯 유다가 질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의 대상 관리조차 제대로 못해내는 하나님이 지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사랑의 대상이 되는 우리 인간의 존재성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 구현'도 실패로 돌아가고 불가능하다는 점에 인간의 보편적 존재성이야말로 구원의 궁극적 이유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반발의 속셈은 따로 있다. 곧 구속사의 수립이 하나님 일방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도 구속사의 도입의 불가피성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 내막을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들이 배제될 하등의 이유가 없고, 더 나아가서 인간들이 자기 존재성을 기초로 수립한 구속사와 크게 빗나가지 않으리라는 내용상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구속사를 구상하면서 첫 번 시작과 맨 마지막 목표를 의식하자마자 그 선들의 상호종속성과 통일이라는 사상을 물리칠 수 없게 밀어닥친다. 역사 경과 자체의 의미통일과 수평적 통일!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디서 가져오며 어떻게 알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적 실재성을 위하여 따로 인식론에 요구되고 있다. 인식적인 것의 근거 설정과 규정과 변명을 존재적인 것에서부터 얻기 위하여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를 구별 지우는 데부터 시작한다. 즉 인간만이 역사를 만들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그 역사의 부분으로 참여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어떤 것을 말하게 된다. 바로 이런 연유로 객관적 자연 세계를 규명한 우주론과는 별개로 인간학 위주의 새로운 신화를 낳게 된다. 그런데 이 신화가 영원을 사칭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그 실제 역사로 인해 보장받는 영원임을 증명해야 되는 부담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 등장되는 것이 소위 미래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한 '믿음'(신앙)이다.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에 직면하면서 '믿음'이라는 것을 거론한다는 것은 역사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에 관해서도 새로운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곧 '믿음'→'이해'로 바뀔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말이다. 즉 임의적인 사건들을 한 통일성 안으로 묶어내지 못하는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하니 믿음의 내용에 관해 이해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내용물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물로 채우는 것이다. 그 이해 안에는 초자연적인 자리도 필히 마련한다. 즉 구속사 자체가 초자연적인 면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끊임없이 이해→'믿음'으로 나아가는 합당한 구원 요건이 구비되어야 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역사 상태와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역사 상태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차이를 좁히고 극복하는데서 '행함의 자리'가 부상된다. 만약 믿음에서 출발하면 '행함'의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행함을 지속적으로 제거시키고 부인하는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고난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가 자기 '행함'의 증인에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다.(벧전 5:1/2:21) 만약 인간의 행함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은혜로 인해 남은 자는 발생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은혜는 고유 원칙에 따라 구원을 이루시는데 그것은 '남은 자'는 원칙이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롬 9:27 참조) 은혜는 언약에 준해서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자만에게만 적용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벧전 1:2) 은혜의 온전함에는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믿음은 추가적으로 인간의 행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믿음에서는 오직 믿음만 계속 나온다.(롬 1:17) 여기에 비해서, 인간의 '행함'이란,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이해성을 기본으로 하고 그 이해한 바에 대해서는 충분히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력을 발휘해 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요소는, 옆의 사람의 이해력이나 가까운 주위 사람의 이해력이 아니라 행함의 당사자인 곧 '나'가 이해하고 있는 이해력이 곧 나의 '행함'의 동기가 된다는 점이다. '행함'을 의식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이해력을 그 인간 혼자서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에 휩싸이게 된다. 이 양보 못할 고유성 확보로 인해 그 사람은 극한 희열에 사로잡히게 한다. "보라, 목표는 섰다. 주의 명령을 행해보리라. 내가 무엇과 싸우고 무엇을 행하는지…!" 절대적 주체의식에서 유발된 투지, 이것이야말로 생물체가 산 생물로서 가지는 존재성의 절정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기 행위 함에서 나오는 이 환희의 맛을 잊지 못한다. 자기는 어디까지 기죽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인간이 되고 싶다. "내가 이해하는 바에 따라 내가 행하겠다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인간은 늘 이런 식이다. 중보자가 행하시는대속의 의의(意義)가 무참하게 밟혀버리는 순간이다. 주님의 찔림과 매맞음(사 53:5)은 인간의 자기 고생담에 밀려서 그 가치가 어디론지 살아지기 일 수이다. 그리고 십자가(자기 부인)를 향하여 눈을 돌리게 만드는 다음과 같은 주의 은사성은 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인간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무의식적으로 반감을 갖고 있다. 인간을 죄인취급하면서 행하시는 대속의 기능도 그렇고 그 우연적인 적용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8-9) 이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강하게 반발하는 태도를 눈여겨봐야 한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즉 "왜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방식이 구원이 실시되는 겁니까?"라는 반발이다. 예수님 당시 예수를 만난 대부분의 상식 있고 건전한 인사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상종하지 않으려 했다. 이 인간 나라에 불필요한 인물로서 제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림받는 자'로서 세상을 끝내야 했다. 따라서 만약 예수님을 믿는다고 "왜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도대체 그 때 그 인간들이 어떤 이해 구조를 가졌기에 그 분을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밀쳤는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그 때 당시의 유대인과 동일한 이해 구조를 가졌기에 여전히 그분에 대해서 못마땅함이 여전히 신앙의 주류가 되어 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하반절)라는 말씀은 아직도 인간들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이해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충돌한다. 인간들의 이해는 우연성을 배제하려든다. 우연성을 주류가 되면 이해성은 와해되고 이해성이 모호하면 행함의 궁극적 의미도 흐물흐물해진다. 자기 행함이 허무로 끝나면 곧 자기 행함에 대한 처리 능력도 신뢰치 못한다는 말이 된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바로 이점은 산 생물체가 근원적 생의 희열이 빼앗기는 경우이다. 따라서 신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한다. 전적인 믿음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행함도 아니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이해의 폭을 초자연적인 것까지 넓힐 용의가 되어있다는 고백을 늘어놓게 된다. 어쨌든 이해의 범주 안으로 신앙을 아우려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행함'의 유효함은 유지될 터니까. 그런데 이러한 타협책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반응으로 다가오셨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 53:1 상반절)'이해' 상태는 자연적인 것이기에 인위적으로 얼마든지 애쓰고 노력하면 처분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초자연적인 것은 이해하기에는 버겁기 때문에 신을 요청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같은 역사를 놓고 이중 역사관이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같은 이해의 범주에 합류시킨다. 역사는 역사로서 이해하고 초역사는 과잉 역사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로되 자연적 역사로서 보는 안목과 초자연적 역사로서 그 역사를 받아드려야 하는 이중 안목은 '행함'에 있어 신에게 기도로서 달성해야 될 역사와 자체적인 힘으로 이끌어갈 역사로 갈라지게 된다. 어쨌든 '행함' 그 자체는 부정(否定)당하지 않는 장치로 인간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실역사의 안목에서는 인간은 가치 생산의 주체자가 되어 완벽함에 도전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발생되는 실수나 잘못한 면에 대해서는 즉시 초역사 성향으로 안목을 바꿔 신으로부터 그 때 그 때마다 자비와 용서를 구하면 된다고 여긴다. 신는 어떤 보완적 기능을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안목 변경과 관련된 '행함'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의 심성으로 넘겨주신 자유의지에 해당되기에 영원히 인간의 몫으로 잔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역사쪽으로 안목을 바뀌었다는 그 '행함' 자체는 하나님 쪽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의롭고 정당한 행위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인간은 아직도 신뢰할만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실패를 해도 내 길을 갈 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기획하고 결단한 행위가 전제되어야지 만 정당함이 가능하다는 정신 자세가 본유가 되어 있기에 이것을 기초로해서 보면, 초역사적으로 눈 돌린 것 뿐만 아니라 실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모든 인간의 행함도 원칙적으로 정당한 일임을 자부하고 확대할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이 공인하는 의인'으로 자처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하지만 현대인들은 내부 속성상 처음부터 의 지향적으로 살아왔음을 공언하면서 그 증거로 율법화 된 자신의 인식의 틀을 폭로한다. 아무리 율법 시대가 지나가도 준 율법적 조항을 뇌리에서 떨쳐버리지 않는다. 어떤 식이라도 율법과의 관련을 맺지 않고서는 의(義)라는 것은 아예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의 행함이 가미되지도 않았는데 난데없이 의가 나를 향해 날라 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기어이 거룩한 법과 자기를 결속시키는 모사적(模寫的) 행위를 보이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한다. 타인의 의(義)와 격차가 지는 나만의 고유의 의(義)를 위하여 여차하면 무기로서 써먹을 종교 기능을 품어도 된다고 여긴다. 이는 명백하게 다음의 성경 구절과 격돌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를 바로 코앞에 두고 기어이 차별 지는 자기 소유의 의(義)에 전 자존심을 걸고 대결에 나서는 그 심보는 도대체 배후에서 누가 조종하기에 발생되는 악인가!이런 정신이 거대한 인류 역사를 떠받쳐왔다. 이로서 인류의 의(義)는 궁극적인 손상이 없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거뜬하게 장만되었다. 이 판단은 실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을 '이 세상적으로', '피안적인 것'을 '차안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사고 방식을 취한다. 인간들이 초역사적 결단으로 내리는 의미의 본질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하고 싶을 때는 인과적 도식이나 종국적 도식으로는 결코 다 정리되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더 높은 층위의 연관 속에 넣어서 논술한다는 식이 된다. 그렇다면 더 높은 연관 속에 있는 개체(예수님이나 먼저 돌아가신 성도나 천사)가 역사 안에서 나타날 때면 그 높은 연관의 법칙에 준한 필연적 질서를 나타내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일단 역사 속으로 들어온 이상 역사를 총체적으로 그 의미를 정립하려 할 때에는 그 독자적인 것은 용납이 된다. 그 고립을 인정해 주지 않고 어쨌든 그 나름대로의 연관성을 요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말이 안 통하는 사이니까따라서 구속사에 있어서 겉으로는 역사학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결국 불가능한 것이므로 역사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내용에 맞도록 재편성된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소개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대중들은 역사 속에서 자리잡게 해 주자는 것이다.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 양식과 초월적 표상은 상호 합치되지 못하면서도 마치 합치된 것처럼 해놓고서는 그 다음으로 해석과 이해의 과정에서 특수한 초자연적 체험을 지닌 자만이 새로운 이해의 특성을 갖자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모든 역사는 실제 역사와 초자연적 해석의 역사는 상호 일치될 수 없는 두 개의 역사관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다. 이 현상은 성경에 나오는 구속사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문학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도출되는 현상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초자연적인 사실을 주장하는 데는 원칙적으로 충분한 근거 설정이 가능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 초자연적 해석적 역사가 도입되어야 될 그 정당성과 그 정당함을 확신해 줄 수 있는 근거는 또 어디서 끌어와야 한다. 그곳이 어딘가?현실 판단과 그 해석에 대해서 확정 지울 기준은 역시 인간밖에 없다는 것이, 구속사가 더 깊은 책임소재지를 요구한 결과이다. 여기에서 '인간 행함의 자리'가 확실히 당당하게 자리를 잡아 들어간다. 구속사는 인간들과 인간들 간의 어떤 차별성과 결부되어진다. 즉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도 일차적으로 어떤 초월적 세계라는 장소를 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무리가 따로 있다든지 하여 인간적 처분에서 벗어난 존재 즉 초월자 내지 신의 존재 방식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어 놓는다. 그런 무리들의 이해 및 인간의 실존은 결국 인간 밖의 문제이다. 반면에 언어 표상은 언제나 처분이 가능한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학적 현상인 신앙 표현을 하는데 있어 언제나 자기 해석으로 머무는 것으로 귀결되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는 이 이중성향이 바로 이중적 역사 개념으로 말미암아 설정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중립적인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능력들로 말미암아 같이 한통속으로 움직여지고 있다는 차원에서 역사 속의 신의 음성을 알아차리려고 한다. 동시에 그것으로 역사를 통째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서 얻어지는 역사의 의미가 새로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아니라 결국 이해가 되고 만다. 신앙이 하나님의 결단이 아니라 인간적인 결단으로 매듭지어진다. 성경은 다른 문헌들과 다른 이해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계시는 인간의 말로 인간에게 전파되었고 그래서 주어진 것이 성경이다 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론 자체에 대한 인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 내용과 부합되지 못함을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인간의 말씀'의 취지는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 말씀/인간의 말씀' 즉 상호 배치되는 관계 속에서만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일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식론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 시도는 기껏해야 동일한 이해의 원래의 자리를 들추어보기 위한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참 신앙에로의 접근이 전혀 가능치 않다. 역사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해의 동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립된 인간들만의 세계에서 시간관이나 역사관에 있어 타인과의 미묘한 차이성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신앙이 타인의 신앙보다 더 옳다는 것을 내세운다면 무리한 논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누구나 능력껏 노력하면 보다 상승된 신앙을 갖출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0-21,25-27) 인간의 행함이 권력에 의해 조정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신 말씀이다. 개인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권력에 의해서 조정 받지 않는 이해력은 없다. 사상도 유행이다. 유행이란 그 사회가 유포하는 무의식적인 사주요 훈육이다. 개인은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해 왔기에 처음부터 자유와 전혀 무관한 채 자유 개념을 갈망하는 본능의 소지자가 되었고 전혀 주체성이 아닌 주체성을 희망하게 된다. 자신의 거부와 자신의 수용 사이에서 달리 결과를 확정되는 운명 같은 것은 아예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여 자신의 선택이 자기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그르치게 만들지는 않을까 해서 자기 실수와 실패에 부담을 느낀다. 이런 폐쇄성에서 내려지는 그 어떠한 판단도 진리 이해에 도움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라는 자기 만족의 일종이 되어 버린다. 소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것을 다 자기에게로 수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와 그 유구한 역사', '내가 행한 목회', '내가 속한 노회의 법이나 총회의 법', '내가 친히 행한 전도나 선교', '내가 행한 기도와 금식', '내가 받은 은혜' '내가 실시한 제자 훈련'이라는 류의 것들이다. 세월이 가면 이런 환영(幻影)들은 어디까지나 얇은 껌 같은 그림자일 뿐이다. 인간들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찌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독자적인 차원에서의 권리나 의무가 아예 주신 적이 없다.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독자적 위상이 허용되지 아니한다. 또한 자신만의 체험을 가지고서는 보편적 하나님의 뜻에 그 어떤 식으로 접근할 수 없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하나님의 뜻은 단지 그리스도의 그 한 몸의 공로에 다 맡기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맡긴다는 말'은. 자기 포부가 이제는 해결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는 해결될 문제가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주님이 주신 세례는 예수님 고난과 영광의 체험만이 지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상황이다. 따라서 몸을 바라보지 않는 지체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신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2) 주님의 강하신 능력이 어떻게 작동했기에 성도가 주님의 몸이 될 수 있었던가를 염두에 두고 살겠느냐는 반문이다. 만약 성도의 개체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세상과 신앙의 세계를 분석하려는 자는 이 '주님의 강함'을 모독하는 자이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미 인간은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롬 1:28) 애써 다른 가능성 있는 추가적 존재적 모습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나쁜 행위로 인하여 인간은 죄인이라고 새삼스럽게 규정해야만 하는 작업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고 단지 죄인이기에 어떤 죄악된 행위를 뿜어내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을 다루어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논점에서 봐서 '믿음', 그 다음에 추가적으로 '행함'을 거론하는 것은 그 '행함'의 진리성 여부를 '행위자' 본인이 규정할 수 없기에 기껏 위선적인 자기 자랑으로만 등장해서 믿음의 주를 훼손시켜버리는 가짜 복음이 될 뿐이다. 야고보서 2장에 말씀하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것은 선한 행함을 믿음에다 추가적으로 보태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행함의 토대가 되는 그 믿음을 행함과 같이 스스로 부정해 버리라는 구원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말씀이다. 복음의 내용은 인간의 행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로마서 3:10, 26과 같은 말씀이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는 그 어떤 시간개념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구원론에 있어 시간개념을 집어넣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으로의 귀결성 표현을 핵심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경대로 모든 하나님 위주가 되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현실을 인간 자신 안에서 포괄하는 역사관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하나님의 계속되는 작업에 맡기면서 자신의 일방적인 구원계획은 날마다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게 된다. 반대로 인간의 자기 역사관이 붕괴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객관화 작업은 자기 구속사관 안에서의 객관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곧 자기가 일방적으로 꾸며낸 구원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의 사역은 그 어떠한 인간의 구원적 요구를 일체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미 십자가 사건이 이 세상 한가운데서 터져 버린 상황에서 성령이 하실 일은 십자가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심판과 그것과 더불어 벌어지는 구원의 기적에 관한 일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그 어떤 인간의 지혜의 협조(칸트에 말에 의하면, 다양한 외부 계시를 접수하여 하나로 표상으로 파악해 내는 '직관의 통일능력')도 필요치 않고 고려해 줄 수가 없다. 오직 구체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뜻만을 겨냥할 뿐이다.(요 16:13) 이것을 하나님께서 고수하려 하기에 하나님의 뜻은 늘 위협과 공포와 절망을 안겨다 준다. 시내 산을 내려온 모세가 함부로 일반 대중들 앞에서 서서 말을 할 수 없어 수건을 얼굴에 쓰고 나타나는 입장이 된 것과 같다.(고후 3:12-18) 성령에게 구원이 일임되어 있다는 것은, 허구 안에서 변별적 기능을 하는 기호로 통해서만 실제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문학의 구원적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영의 차원으로 육의 차원을 정제하면서 일하심을 뜻한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러하다. 하지만 영으로 난 것만 영이다. 이것도 실제다. 따라서 영으로 난 것에 육이 개입될 수 없다는 실제적 내용을 가지고 성령께서는 나타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성령은 육에서 나올 분이 아니다. 육은 육만 배출한다. 영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다. 인간 육의 특징은 구원에 있어서도 그 육을 발판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인간 육을 향하는 모든 '가르침'은(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의 명령적 가르침과 권면이든, 목사의 설교이든, 구속사이든, 복음이든, 율법이든, 일반적인 에티켓이든, 학문에 관한 것이든, 윤리와 도덕과 법이든 상관없이) 오히려 욕망을 생산하는 계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 육이 품고 있는 성질이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8) '가르침'이 어떠한 내용을 가졌던 간에 현 자신 속에서 새롭게 발굴된 욕망을 확인케 한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가르침'을 물고 들어와서 자신의 욕망이 제거되었음을 변명해야 한다. 그러나 욕망은 여러 개가 아니다. 역시 그 욕망이다. 다른 욕망이 없이 그 욕망이 변신을 꾀한 양상이다. 율법은 누가 뭐래도 선하다. 원인은 '육'에 있다. 인간이 그 어떠한 이론과 신학으로서 구원 될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육의 소산물로서의 구원 욕망이 자기의 육적 행위에 의미를 둔 구원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행위 하나 하나마다 나름대로 구속사적 의미로 정렬시켜놓고 그 다음에 외부적인 신과 거래 내지는 언약적 흥정에 나선다는 말이다. 이러니 신의 존재성은 일종의 인간들의 자기 변명이며 도피처이며 구색에 불과하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점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구원과 무관함을 더욱 더 확고하게 다지는 증거로 삼으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성령님은 늘 성도에게 예수님과 마주치게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행위와 비교케 한다.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의 만남에서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서 만나진다. 구약 때도 마찬가지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19:12-13/20:19/고후 3:6-11 참조) 신약에서도 말할 나위가 없다.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심판 행위이시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심판이란 곧 인간으로부터의 구원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가 자신이 구원되도록 노력을 안 하는 경우가 없고 하나님 또한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구원되고자 시도하는 것을 용납해 주신 경우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나서시면 의도적으로 차단시키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받은 자격이 처음부터 주어진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차단을 돌파하고 구원받은 자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은 본질적으로 붕괴되어 버린다. 왜 그런가 하면은 하나님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천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롬 11:32 상반절) 하나님의 가두어 두심에 대들면서 자기 힘으로 돌파해서 생명 나무 과실이 있는 곳에 접근이 가능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힘보다 더 강력하고 센 구원의 힘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악마만이 가르칠 수 있다. 창세기 3:24의 생명 나무 지킴을 무효로 만드는 이런 경우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왕노릇을 유명무실해진다. 왕이란 자기 통치력에 한치의 하자가 없는 입장에 놓인 자라는 것이다. 자기 왕국에 구멍이 뚫린 줄도 모르는 그러한 왕은 정말 온전한 왕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순종치 아니함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이 가두심을 이기고 탈출에 성공한 예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자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의 여호와 전쟁은 '진멸'을 그 특색으로 한다. 불쌍히 여기지 말고(신 7:2) 어린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하셨다.(신 3:6/삼상 15:3) 결코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수 11:20)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구원은 순전히 언약에 의해서 자비를 받는 자에게만 국한되고 나머지는 언약에 의해서 진멸당하도록 맹세되어져 있다. 이게 구원의 전모이다. 인간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긍휼함을 입은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도들의 순종과 의로운 행위가 칭찬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행위가 결국 본인으로 영광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에서 활동하시는 주의 몫으로 돌려져야 마땅하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시 89:1-4/110:1-4)신약에서의 종말이란, 새 언약에 의하여 나타난 종말이다. 이 종말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심판 받을 자로 서 있다는 말이다. 심판 앞에 선 인간은 그 순간 본질적인 자아성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와 같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자 택일의 결단을 내리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심판 당해야 한다. 끝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연약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4-5)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약하신 것처럼 성도도 같이 약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효력이 사도 바울에게 내려졌다. 이로서 사도는 늘 죽어지어야 될 정도로 약해진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12)사도는 결코 자신이 행한 윤리적, 도덕적 덕행이나 선함을 근거로 힘을 발휘하기를 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로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기 위해 자신은 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넘겨지기만을 원했다. 자신이 소유해서 사용할 그 어떤 힘도 자기에게는 필요치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사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보이는 것을 끌어당겨 그것을 모아 전도하는 여력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믿음으로 전도한 그에게 주어진 것은 배고픔과 환란이었는데(고후 11:27-28) 그것으로 인해 사도는 더욱 더 약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한시도 십자가의 현장을 제쳐놓고 떠나버릴 수 없다. 그리고 십자가를 뒤로 돌리고 새로 뭔가 시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대로 받은 그 죽음 속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비로소 생명을 말해서 해석해내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죄로 기인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미 죄인인 채로 계속 가는 것이다. 죄인 된 자신을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따로 뽑아내어 그것으로 뭔가 새로 시작할 입장이 되지 못된다. 그렇게되면 죄인으로써 예수님의 공로와 무관한 절대적 죄를 마구 온 우주에 살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면 예수님의 의로 인해 의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그 안에 이미 죽은 자인고로 자신이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와 연관되는 죄를 보이게 되며 동시에 (주님의 대속의 죽음과 분리되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의인인 것은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한 의임을 온 우주의 살포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는 절대로 임의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입장이나 권리가 없다.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다만 평생을 다 가도록 죄가 자신을 통해서 계속 새어 나오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본인이 죄로 인해 처벌받은 자의 입장에서 계속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럴 때마다 성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비록 수고한다 할지라도 내가 아니요(이점이 대단히 중요함)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딤전 1:15)) 이로서 성도는 자신을 증거 하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만을 증거 하는 인생을 산다. 이것이 바로 다음의 말씀의 성취이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심은 산 자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주님의 구속의 활동은 인간의 구속사를 늘 정죄한다. 그것은 단 한번이 아니라 매번 늘 정죄한다. '때가 찼다는 것'의 의미는. 역사 자체가 정죄를 받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연장시켜 추가적 비밀을 얻어 낼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종말은 더 이상의 시간 연장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세계시간 상의 끝부분이 아니다. 종말은 세계의 일부도 아니며 세계 안에 아무런 병행항도 갖지 않는다. 이 세계 안에서는 그 어떤 특정한 상태로도 표현할 수 없고 연장을 은근히 고대하는 세계의 눈으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언제나 마치 '아닌 것'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밑둥치를 제거하는 종말론을 누가 상상하고 싶어하겠는가?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와 관련 없고 오직 예수님만 관련 있다. 옛날에 있었던 창조의 일이나 장차 있을 종말의 사건도 마찬가지이다.그러므로 바른 의미의 창조와 종말론은 그 창조와 종말이 이제 완성의 차원에서 주님에 의해 자기 성도에게 늘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데 있다. 나의 창조나 나의 종말이 아니라 혹은 내가 만들어 가는 창조나 내가 조심하는 종말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와 종말이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 성전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6:19-20/7:29-31) 자신의 결혼보다 취직보다 성공보다 자신의 죽음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뜻에 탄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행함에 매달리게 만든다. 이것이 큰 문제이다. 자신이 죽어 없어지는 종말의 심판의 한 복판에 와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에 대한 미련을 포기 못하고 자기 구속사에 끝까지 기대를 걸어보는 이런 불신앙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그것은 죄에서 오는 것이다.성도를 구원받은 인간이 아니라 구원받은 죄인이다. 성도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다. '아담 안'은 곧 죄인들의 집합이요 전부다."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2-14) 인간이라는 규정은 이미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자기 실체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는 허구적 발상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인간이란 없다. 그 어디에도 없다. 공연히 죄인들이 죄인 아닌 척 하기 위해 지어낸 용어이기에 이 발상 자체가 죄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오직 죄인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자+인간≠성도'이며 곧 '하나님의 구원자+죄인=성도'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의 관권은 죄인인 성도 본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에게 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 9:6 상반절) 그런데 죄가 무엇인가? 인간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비로소 밝혀진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인간은 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즉 예수님 앞에서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죄를 더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 아래 있는데 그것이 드러나기를,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인정치 않는 바로 그러한 현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죄를 궁극적으로 모르도록 되어 있는 존재인 것을 주님은 일러주시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죄 아닌 것이 없으면서도 죄 인 것과 죄 아닌 것을 임의로 구분하는데 율법까지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율법에 대한 왜곡된 해석에 근거해서 그 규정에 의해 죄와 의를 구분 지을 수 있는 판단력이 우리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율법에 자칭 정통하다 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37-39)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셨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7:45, 47) 즉 바리새인들은 철두철미하게 모세법에 준해서 죄와 의를 구분 짓고 그 모세 율법을 기초로 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모세 율법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따라서 모세 율법이 정죄하는 그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유독 예수님만이 독점적으로 알고 계시는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 외에 모든 인간은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이해 불가능함에 놓이게 된다. 예수님의 주장은 참으로 일방적이다. 인간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준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주장을 예수님은 펼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과 인간들 간의 거리는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멀다. 함께 있다고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31-32)이러한 해석 차이는 요한 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극한 대치를 보였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자는 너희들 중에 없다는 주장을 하신다. 즉 죄가 전혀 없는 자만이 말씀의 참 뜻을 헤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죄 있는 자는 율법을 해석할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자신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못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예수님 보기에 죄가 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새로운 규정의 죄 규정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죄를 사해주시는 자비이다. 즉 주님에게서만 나오는 그 자비를 믿지 아니하는 바로 그것이 궁극적 '죄'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다. 바리새인들의 죄 규정에 근거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새로 규정한 죄 규정에 의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다음 구절이 그 해답이 된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