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간으로 만드는 "행함의 자리"(2)
3. 시간으로 만드는 '행함의 자리'(2)
이름 : 관리자(IP:219.249.86.250)
이와 같은 동행의 원리는 멀리 출애굽 시작부터 있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즉 히브리인들이 결코 애굽인들 보다 더 의로워서 그들에게 10가지 재앙이 안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신 9:5) 하나님은 치료해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셨다.(출 22:27) 만약 이런 자비성을 잊는다면 가차없는 진멸과 멸망이 이스라엘에게도 떨어진다.(신 8:20) 자비로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하는 회개는, 주님의 자비심에서 벗어나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정죄의 관점을 가지고 타인과 자기를 죄인이라고 규정한 그 죄 규정 자체에 대한 회개이다. 유대인들은 가혹하리만큼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율법으로 들볶았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 있는가. 참 회개는 주님의 자비심을 알게 된 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인간들이 스스로 이런 자기 죄를 알아서 회개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무효가 되기에 절대로 생길 수 없는 일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1-16)
이 본문에서 '허락'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는 선포가 담겨 있는 대목도 있다. 이런 복은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구원의 근거를 '뺏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고서는 '넉넉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날 수 없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래서 '복'이고 '허락'이 되는 상황이 유지된다. 즉 이사야 6:9의 말씀이 인간의 겸손한 회개나 경건성으로 인해 취소되거나 말소되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모든 말씀의 성취는 필히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만 성취되어진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0-11)
말씀 성취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행위뿐인데 이 행위에 인간들의 시간 의식에 준해서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도리어 숨어 계시는 양상으로 계시된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시간 의식이 적용된다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는 표현을 구태여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도리어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이삭의 자식들이 이 지상에 태어나서는 선한 행위, 혹은 악한 행위를 각자 하게 되는데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된 운명대로 실시된다. 따라서 하나는 사랑 받고 다른 하나는 저주받는데 이는 그들이 이 지상에 남긴 자신의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식으로 인간 행위를 제 근거로 수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은 인간들의 행위 여부에 따라서 죄라고 규정한 터전 위에 출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든 것이 죄라는 범주 안에서 출발하면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비성만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성은 자기 백성의 행위 여부를 보고 후차적으로 추적하듯이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구약에서 각가지 인물들이 나타나서 사태들이 일으켜도 그 모두는 종말 때 보여지는 실체를 위한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히 1:1-2/8:5/9:23) 이처럼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창세 전에 누구 안에서 선택함 받았느냐에 증거하기 위해 이미 확정되어 창조된 자들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5,11) 그런데 이러한 일의 실천자는 오직 바로 예수님뿐임이 요한 복음 6:39에 나와 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예수님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아시는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요 5:20 상반절) 따라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원 사역에 있어 하나이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28-30) 즉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빼앗기거나 혹은 얻게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구원하시는데 있어 행위의 연쇄성에 하나님이 일체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직 은혜로 된 것이기에 은혜만 드러내는 방식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이러한 구원의 상황은 세례 요한의 경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 행위에 관한 시간적인 요소는 철저하게 외면 당한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5) 분명 구약이 신약보다 시간상 먼저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먼저 구원되고 나중 구원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같이 시간과 무관하게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성 안에서 비로소 확인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주실 뿐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예수님은 인간들이 얼마나 시간의 흐름에 매여 있는지를 구약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을 때에 먼저 말을 걸으신 적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주' 개념과 '자손'개념을 대비시켜 바리새인들을 당황케 하시고자 하셨다. 즉 '주'되시는 분은 시간상 시작에 해당되는 자리이기에 결코 '자손'의 자리에 서 계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윗은 '주'가 자신의 '자손'이 된다고 했느냐 라는 것이다. 시간의 역류인가 아니면 시간과의 무관성인가? 그 당시 바리새인에게만 묻는 물음이 아니라 구원을 고대하고 모든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질의이다. 무어라고 답변할 것인가? 예수님은 인간들의 시간론 자체를 두고서도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이유를 찾아내신 것이다.
결국 성경 전체는 성도의 개인적인 일생을 초점을 두고 추적하듯이 구원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과의 구별성을 가지고 구원을 소개하신다.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시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말은 인간들의 지상에서의 출생 순차와 같은 그런 차원 속에 놓여 있는 출생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몸에게서의 출산은 세례 요한보다도 오히려 늦기 때문이다. '먼저 나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 출생의 창조적 근거자 위치에 홀로 계신 분이다 는 뜻이다. 즉 '태어날 모든 이'는 그 분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를 보여주기 위한 목표로 출생되어진다는 말씀이다. 이 목표 앞에서는 그 어떤 시간적 요소도 이해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없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시간상으로 성도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서 시간적 요소를 구원의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시간성을 지닌 표현 방식을 동원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참되게 증거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론될 수 없는 것이다. 성도가 '이미'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며 비성도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표현한 '이미'와 '아직'은 개인들이 하나님에게 궁금해하는 자신의 구원의 진척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에 있어 그 결과로 인해 구원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이 서로가 대비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이 원칙에 준하면 성경에서 성도의 개별적 구원성을 확정지어 질 성경 구절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대비성이 성도 개인이 기준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모든 성경이 거부하고 있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인해 구원 기준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필연적으로 인간들의 자기 구원을 위한 성경해석을 가로막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구원되지 못하고 정죄 받는 자들의 불의한 점이 결코 구원된 자들과의 행위 비교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모든 성경 구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참 성도인 점을 감안할 때, 참 성도가 아닌 자는 이 사실을 당연히 거부함과 동시에 자신이 참 성도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시간의 틀로서 성경 구절에 접근해서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구원 적용이 이미 자기의 결정권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도저히 인정 안 한다. 성경에 나와 있다는 구속사를 근거로 필히 자신도 그 구속사에 놓여 있다는 전제로 인해 그 구속사에 몸을 싣는다. 과연 성경이 이러한 시도에 호옹해 줄까? 이렇게 보면, '이미- 아직'이라는 시간적 표현 방식 안에서 구원 사역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검증을 거치겠다는 것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서나 나올 이론이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외쳤는데 (요 19:30) 소위 성도라 자처하면서 '아직'을 고백하고 있다면 정신을 엉뚱한 데로 팔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은 '아직'이라는 미완료 측면에서 고려해 볼 만한 여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물론 이들의 믿음 속에서도 여전히 미완료성은 살아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 쪽으로 점검해서 납득이 가능 방향으로 수용하겠는데 어쨌든 자신의 판단에 의하면 아직 구원이 미완료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이 세상의 현상 속에서 명백하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어 허기져 있다. 인간은 육을 지녔기에 본인이 관념적인 신의 자녀라는 점보다 이 사회의 자녀라는 점에 더 실감을 느끼고 절박한 문제로 다룬다. 그래서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이 차에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하나님으로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런 육적인 하나님 상으로 조명해 볼 때, 이 세상은 복음 전파 이후에도 이렇다 할 혜택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0:1-4를 통해서 보면, 육적인 인식이 얼마나 크게 하나님에 대해서 곡해하도록 있는지 파악되도록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본문에서는, 같은 구름 아래의 생활과 같은 모세와 같은 만나와 같은 물을 마신 경우를 같은 그리스도로 인한 다 같은 세례 환경으로 보고 있다. 즉 경제적 여건이나 삶의 조건의 불평등이 전혀 하나님의 일의 초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세례'라는 입지 안에 놓는 자들은 모든 육적인 불평등이나 미완료적 가치 평가 환경에서 벌써 벗어나 버린 것이다. 생활 여건의 불충족성이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는 미완료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자들이 이런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 같음'과 '한결 같음'을 이해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 세례 안에는 결코 '발전'이나 '진보' 같은 미완료적 뉘앙스를 용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적인 자들은 구원을 달리 생각하고 있다. 자기 삶의 여건에서 출발한다. 지금은 그저 구원받을 개연성만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기회 앞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식이다. 따라서 이 구원을 계속 성취해 내기 위해 갖추어야 될 신앙의 기초 조건을, 세속인과는 뭔가 다른 면에 대해서 인내하는 신앙인 자신의 각성에다 두고 있다. 자기네들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끝까지 인내로 기다려 줄 수 있다고 한다. 천국으로서의 미완료적인 요소가 완벽하게 보완되어 완료의 모습을 보일 때까지 자기네들은 소위 '믿음'이라는 지탱하여 성도로서의 도리를 다해주겠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되면 하나님은 자신이 벌린 구원의 미흡점과 보완점이 이들의 신앙에 의해 이미 발각 당한 입장에 놓여 있기에,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헛말이 되어 버리는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내용물이 추가적으로 채워놓는다는 조건 하에 천국을 믿어주겠다는 이들의 믿음 공세에 밀려 합의라도 봐야 될 신세에 놓인 셈이 된다.
즉 예수님이 이미 하신 일과, 미완료성을 아직도 믿는 자신들의 신앙만이 참 신앙이라는 주장 사이의 놓여 있는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아직 신앙의 내용은 다 밝혀진 바가 없으니 아쉬운 딴에 그저 장래의 개연성에 희망을 두는 정도의 믿음이라도 참 믿음으로 인정해 주겠다"라는 선언을 터뜨리라는 것이다. 물론 주님은 이들의 이러한 불신앙은 철저히 정죄하신다. 무엇으로? 십자가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또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쫓음이요 그리스도를 쫓음이 아니니라 …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8,15) 철학과 세상의 학문은 결코 '승리했음!' 표현을 건방지게(?) 함부로 사용할 수 없으리라!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화를 보게 되면 신들이라는 작자들의 행동거지가 인간 군상들을 꼭 닮았다. 폭군(가이아, 제우스), 패륜아(크로노스), 질투의 화신(헤라), 간통자(아프로디테), 깡패(아레스), 도둑놈(헤르메스), 병신(헤피아도스), 술 주정뱅이(디오니소스) 등 각종 성격을 총망라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 있어 이러한 신 인식은, 만물이 상호간의 호혜적인 사랑에 의해 구성된다는 믿음의 토대 위에 도출된 결과이다. 신과 인간이 멀어지거나 따로 떨어지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세상이 구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지평적 융합' 안에서 의사소통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래는 적당한 유혹으로 형성된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은 거래 여하에 따라 허물이 조정된다. 우주는 부조화 가운데서의 조화이다. 즉 신들에게도 저마다 약점을 갖고 있고 신들에게도 허물이 있기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각종 실수와 욕망의 모습에 대해 운명은 너그럽게 용납해 달라는 희구의 반영이다. 우주의 움직임이 그러하듯이 신들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은 인간들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챙길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된다는 것이다. 신도 자기가 만든 인간으로부터 인정받는 재미로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 광할한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우주 속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우주'라고 인정받고 싶어서 존재하는 것처럼.
신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보호하고, 이뻐해주고, 심사숙고해주고, 위대한 영웅을 창조해서 심어주어 난세를 풀어 가는 그런 역할에 충실할 때 신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 역사를 초월한 보편적 통념이다. 신화 그 이후에 이어져 나오는 모든 학문도 이런 통념의 바탕에서 이어받아 인간의 정당성을 확실히 다지는 쪽으로 학문적 개방을 주저하지 않는다. 학문 세계에서는 정보의 개방된 교류에다 생명을 걸고 미래를 건다. 이런 학문적 속성에 준해서 볼 때 "이미 십자가로 승리했음!"라는 주장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종교적 독단처럼 보일 것이다. 도무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아무도 자력으로 못 믿게 하기 위하여 마지막 때에 비밀로서 등장하신 것이 구원이 메시지이다. 이성의 판단과 눈으로 볼 때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아직 아니야. 왜들 이래. 세상은 이 정도에서 진화가 멈출 리가 없어. 신앙이라는 아편으로 황홀경에 빠지는 식으로 비겁하게 미래 문제를 외면하지 말어!"라고 손을 절레절레 젖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처럼 이러한 이성적 판단에 준한 인간의 행함에 전적으로 기대를 거는 태도는 오늘날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역사에 걸쳐서 힘차게 세월들을 깔아놓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중심 이외에 벗어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친히 지셔서 유발하신 십자가 차원은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이미'로서, 소위 '이미-아직'이라는 구원론의 시간성 자체를 공박하신다. 그 예의 하나로, 로마 군대 백부장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나오는데 시간적으로 '이미' 구원받았으니 앞으로도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자의 허점을 다른 차원의 신앙을 개입시켜 정죄해 버리시는 예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0-12) 즉 예수님은 천국에 이르는 신앙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백부장의 신앙과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의 차이는 현재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로 '이미' 결정 나 있는 것이다. 지금 완전한 주님과 완전히 사귀는 자가 아니면 결코 천국의 유업자가 아니며 만약 지금 주님 안에서 주님과 사귀고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구원 완성의 차원에서나 나올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미'가 되었든 '아직'이 되었든 시간적 이미지에서 못 벗어난 자라면 그 연계성 고리마저 끊어버리는 진정한 구원을 맛보지 못한 자이다.
시간을 초월한 구원의 능력이 다시 시간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시간의 연계성 속에 자진해서 헤집고 들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를 말해준다. 십자가는 자체적으로 능력을 갖고 발휘한다. 사람들의 저항력에 멈칫하는 능력이 아니다. 하늘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라도 이 능력을 저지할 수 없다. 인간들이 손에 넘겨준 능력이 아니다. 성령께서 친히 발휘하시는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걸림돌의 기능을 가지고 활동한다. 어떤 것들이 이 십자가가 제시한 걸림돌에 자빠질까?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8-9) 이 본문에 보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라는 엄청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이 십자가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즉 구원 얻기 위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바탕은 그 어떤 수단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 자체에서 나오는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을 뿐이다.(고전 1:18) 그리고 십자가로 대변되는 그 하나님의 깊은 지혜는 인간의 육의 노력과 전혀 이미 무관한 채 오직 하나님 자신이 친히 제공하시는 성령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이 현실이며 실제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1-12)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인간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을 완벽하게 구분 짓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성경에서의 '이미'는 개인적 구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사역의 실정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 즉 사도는 개인적으로 자기 구원에 대해 새삼 걱정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걱정은 주님의 구원에 있어 생길 수 없는 일이라고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누구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좀 더 뒤에 나오는 말씀에 견주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19-22)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라는 대목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개인적인 구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예'를 이용하면 된다는 그 어떤 마음도 여기에 담겨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상황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요한 서신에 나오는 모든 인간 행함에 대한 검증이나 구별은 이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되레 소유할 그 어떤 명분도 사라졌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전 19-20) 따라서 성령의 인치심은 이 십자가에 성도가 죽은 상황을 (혹은 값으로 산 상황을) 지속적으로 주님의 '예'에 합당한 차원에서 끌고 가는 것이 완성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의 명령은(빌 2:12), 그 명령 자체가 성령에 의한 구원 완성의 능력으로 퍼져 나가는 자가 따로 존재함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즉 ""구원받아라!"라는 차원과 같은 차원이며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와 같은 차원이다. 이 명령은 아무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있는 자에 한한다.(행 3:16) 마치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으라"라는 명령이(마 9:5) 명령 자체에서 나간 능력으로 인해 중풍병자가 완벽하게 구원되는 경우와 같다.
그 명확한 내용이 사도 바울로 통해서도 다음과 같이 증언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님께 붙잡힌 바 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그 부르심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이 본문에서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잊어버림'이란 과거를 과거로서, 아름다운 추억으로서 귀하게 포장해 두라는 말이 아니다. 즉 현재의 의미를 위해서라도 과거라는 시간으로 구색을 갖추라는 의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잊어버림'으로 인해 현재는 과거와 연관된 현재가 아니라 그냥 늘 시작되는 상황 안에 있음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이라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야고보서 5:9에서는 이 점을 확실하게 표현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이 본문에서 '심판자가 문밖에 서 있다'는 말씀은 자아의 절대성은 더 이상 절대성을 유지할 수도 없고 불가침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절대적 공간에 더 이상 자기 존재를 숨길 수 없다. 도리어 잊어버려야 한다. 심판주를 의식하면서 시간의 감금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개인이 과거-현재-미래를 한 세트로 하여 시간 정렬을 소유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과거의 이력이나 경력이 그 어떤 가산점을 부여하지 않는다. 도리어 '잊기를' 원하신다. 매일을 살고 매일을 잊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잊는 것보다 더 한 것은 매일 매일 죽은 것일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왜 성도는 늘 죽어도 살아있는 것인가? 그것은 순간 순간 하나님의 종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입되지 않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그 은혜가 은혜로 되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성도는 오로지 현재에 주어진 명령에 따라 존재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것도 무익한 종으로서 말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성도는 이처럼 시간적 요소로서 구원의 틀을 만들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식이 아니라 늘 작렬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사명 감당하면서 성도는 구원된다. '뒤에 것을 잊는다'는 사도의 고백 안에서 사도는 자신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다. 미래의 화려함과 찬란한 성공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상대적으로 비교거리가 되는 과거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사도의 생각이 아니다. 사도는 자신이 걸어온 자국과 그 모든 행함 자체를 잊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또 쌓게 될 자신의 행함도 마찬가지로 잊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잊음'과 '잊음'의 연속만이 구원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이다. 잊음이 없이는 앞에 있어 푯대로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미래는 과거와 무관하다. 미래는 그 때가서 하나님이 새로 발생시키시는 능력에 의해서 채워진다. 그래서 미래는 순전히 인간의 기다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될 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뒤에 것을 잊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할 것 없이 항상 주안에 놓여 있어 새로운 자신의 본질을 부여받는다. 이와 같은 상황들은 다음과 같은 보편적 구원론으로 대변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처럼 사도의 명령이나 주님의 명령이나 또한 설교자의 명령은 모두 구원될 자가 누구인가를 구별짓는 사역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사도 바울이 경험은 구원 사역은 항상 이런 식의 결과를 유발한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3-5) 이 본문에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즉 망할 자들이 필히 복음이 가려진 입장을 고수하는 것조차도 바로 예수님이 주되심으로 인한 작용과 구원적 기능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제일 마지막 대목도 이러한 정신에 부합된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행 28:24-28)
사도 바울의 자신의 전도가 안 먹혀 들어가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말씀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씀대로 완악한 자들은 필히 완악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단이 부흥하지 않는 지옥이란 있을 수 없다. 이단은 꼭 부흥되어야 하고 악마의 일꾼들은 날이 갈수록 활개쳐야한다. 이것은 말씀 성취의 완성된 종말이기에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말씀을 빠짐없이 다 들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성취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랑은(딛 3:4) 오로지 택한 자에게만 흘러 들어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딤후 2:10)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경은, 영역의 확장으로서의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지상 차원이 아니라 말씀 성취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8) 전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아직'은 그만큼 좁혀진다든지 메워 나갈 수 있다는 발상은 주님의 정신과 전혀 다른 것이다. '아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에 전도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내는 분의 전도의 성취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보냄을 입지 못하고 또한 그렇게 보냄을 입은 자가 등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발걸음 자체가 전도의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말씀이 완성된 시기이기에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반응된 자는 이미 종말적인 구원 원리에 의해서 반응 받는 자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여기에 나오는 '너희'에 해당되는 자는 결코 새삼스럽게 구원되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자가 아니다. 이 주님의 완성된 말씀이 적용됨을 보여지는 자들이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8-9) 그래서 아직 구원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든지 아니면 아직 구원되지 못해서 허기진 자는 이러한 종말적 상태를 가리게 되는 자이다. 즉 여전히 어두움의 일을 벗지 못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를 구원받은 자라고 간주해 줄 어떤 근거도 없다. 또한 어두움의 일을 벗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나중에 구원이 된다고 여기는 자도 주님으로부터 구원된 자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능력으로 어두움의 일을 벗을 수 있는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성도는 다음과 같은 자이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이러한 영광성은 예수님에 의해 비로소 말씀이 성취되었음으로 나타냄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취지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1)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유혹으로 작용한다. 구원 이야기도 유혹의 일종으로 받아드리며 자기 구원으로 이전시켜 놓는다. 그래서 자기만의 의를 생산하여 따로 간직해 두려고 한다. 그것 없이는 '나 만의 나' 됨이 상실하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처럼 유혹의 절정이며 최후로 빠지게 되는 황홀한 함정이며 동시에 놀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 말을 듣지 아니한다. 복음은 지속적인 심판이며, 택한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저주 행위이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게임으로 만들어놓고 성직자들은 그것을 사업체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성도는 그저 자기 인생을 뜯어내며 사는 자이다. 시간으로 중무장이 된 세월을 뜯어내면 그 자리가 어두움의 자리로 드러난다.
이제 태초의 빛은 복음의 광채로서 이 종말시에 등장하셨다. 복음의 빛으로 인해 어두움의 정체가 드러났다. 모두가 병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다. 복음 안에 들어있는 자는 십자가 거울 안에 들어있는 자와 같다. 세상과 서로 마주보고 있으나 서로 손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빛은 이 땅에 새로운 피조물을 발생시켰다. 그들은 자신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만 앞장세우며 사는 자이다. 그들은 빛과 사귀기에 정신 없다. 세상 좋은 줄 모른다. 이것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선(행 26:18) 사람들의 특징이다. 여기에 비해 세상 사람들은 늘 자기 형편만 살핀다. 그러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있음을 안다. 사귀었지만 사귄 것이 아니다. 자기가 구원되기 위해 하나님도 이용하고 예수도 이용하고 교인들도 이용하고 목사도 했을 뿐이다. 이들은 사귐은 없고 애씀만 있다. 자기 시간을 측정하고 자기 구원사 챙기기 분주하다. 자신이 자신의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질곡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성도가 빛과 사귀게 된 것은 그 빛을 일부러 불러내어 소유화 한 것이 아니다. 그 빛은 어두움의 경계선을 넘어 길게 뻗어 들어오신 것이다. 양치는 목자들의 주위를 두루 비취던 그 빛의 '터 잡음'이 (눅 2:9) 바울에게도 일어나고 모든 성도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하나님과 성도와의 사귐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가능하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신학 탐구, 그것으로도 빛되시는 분과의 사귐을 대신할 수 없다. 신학이 인간을 위한 인간 구원을 돕기 위한 취지로 진행된다면 깜깜한 소경의 절규에 해당된다. "땅의 것을 생각치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골 3:1-3) 도로 땅의 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신학을 만들어서 소지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지혜는 헛것이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가지고 (고전 3:20) 어떻게 세상 지혜를 긍정하고 옹호하는 신학을 전개할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다루면서(고전 2:4-12) 어떻게 인간의 종교성을 신뢰하자는 신학을 내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십자가는, 인간들의 신학마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고 부정한다는 점을 신학에 천착하는 자들마저 자동적으로 아는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 신학의 죄악성이 노출된다. 신학은 사람을 구원해주기 위해 발판을 만드는 작업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도리어 그것을 부정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지금 앉아 계시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지를 증거 하는 것만이 내용이어야 한다.(행 2:34-36) 신학은 시간 의식이 토대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경향을 결코 속일 수 없다. 그럴수록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고 그리스도만의 공로만 내세워야 하는 고백으로 터져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목회나 신학 작업조차 어느 새 '자기 죄 위에 페인트칠하기'의 한 경향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십자가는 신학자라고해서 봐주고 비켜지나가지 않는다. 우수한 설교자라고해서 따로 반 편성해 주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영원히 십자가 앞에서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거기서 영원한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진 것을 두고두고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다만 빛에 의해서 빛의 자녀가 된 것뿐이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주님은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놓여있는 자기 자녀들에게 다음을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그렇다, 은혜를 받았은즉 고난의 잔 또한 받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