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와 복음
신비주의와 복음
신비주의 종교는 신의 세계에 대해서 충실히 알므로서 도리어 신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금지 조항으로 주어진 율법에 대해 이들은 복음을 들먹이면서 율법과 무관한 대상으로서 자아를 정립해 놓는다. 복음은, 이들에게 있어 자아에게 다가오는 하늘의 심판 사자를 빼돌리는 유인책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성경 내에 자리잡고 있는 율법과 복음의 대비적 입장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서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가 주는 도덕적 규칙과 금지 조항 앞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압력에 직면해서는 도리어 극복해 보려는 자극을 받는다.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
여기에 '해방의 논리'가 등장된다.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보다 자발적이고 자의적으로 선을 행사하는 바로 최고 차원의 선임을 강조한다. 이 자발성을 위하여 신께서 인간에게 넘겨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상호 간에 열린 관계가 형성되어야 바람직 하다는 것이다. 닫힌 관계는 신께서도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께서는 자기 자신을 이 땅에서 자유인의 모양으로 등장시키므로서 이상적인 인간형을 이미 알려 주셨다는 주장한다. 여기에 대항하여 기존 사회 체제는 보다 강력한 규범으로 맞서보지만 그런 강제적 규정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규범들은 일종의 미신과 같아서 그 조직체가 맹목적인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신화적인 관습을 유행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란다. 정기적으로 또한 의무적으로 시행되는 상징적 종교 행위를 통해 공포에 대해 평안감과 함께 마음을 진정시켜 주려는 시도는, 종교의 본질보다 종교의 기능에 초점을 둔 미신이다 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무적 종교에 대항하여 은총적 종교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신의 은총 곧 복음은 인간의 행함을 오히려 격동시켜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보편적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행함에 대해 기쁨을 제공하기 때문이란다. 신의 사랑에 의해 인간의 생명력이 이끌림을 받으면 그 사랑이 끊임없는 창조적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이다. 신의 감동이 인간의 감동으로 전수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은 신의 창조성 속에 참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모든 활동은 신의 바람을 타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늘 발전하고 전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창조성이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기쁨은, 단순한 죽음과 미래에 관한 불안 해소로서 오는 기쁨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란, 이런 자아 해탈에서 오는 희열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로서의 복음이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복음 안에는 참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삶의 자리는 없다.(고후 5:15) 자아 발전도 아니요 자아 전진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자리만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 바로 이것을 통해서 세상은 그리스도 앞에서 모두 부정 당하는 증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으로서 십자가의 심판성이다. 성도의 존재는, 바로 이 심판성이 세상으로 향하기 위해 오늘도 복음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