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에 관한 문제
생사에 관한 문제
죽고 사는 문제는 흔히 병원의 중환자 실에만 국한되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사활 문제는 현 세계 안에서 어디서든지 벌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인간의 모든 행위 하나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왜 인간들의 세계는 하나님의 분노만을 유발할까? 그들에게 자기 행함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뜻은 하나님의 뜻하고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들은 오직 자신의 모든 행동을 자기 뜻만을 달성하는데 진력을 다한다. 이것을 육체의 일이라고 한다. 거기에 비해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일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요 6:29) 이 믿음 안에서 인간의 뜻이 함유되어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실현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있는 내용만 들어 있다. 이 인간의 뜻과 하나님 뜻이 만남에서 죄가 발생되고 그 값으로 죽음이 떨어진다. 이로서 하나님의 일이란 이 세상 안에서는 사활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자기 소망과 뜻을 달성하는데도 나름대로 믿음이라는 것이 바탕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이 실제로 실행해 낼 수 있는 것에 대한 신뢰와 기대치에 관한 믿음이다. 사람이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에 관한 믿음이 아니다. 초인적이고 신만이 해 낼 수 있다고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행함을 거기에 삽입시켜 보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 행함이라는 낚시대에 달라붙은 그 신기한 하나님의 기적을 떼먹는 재미를 가지고 신을 섬기려고 한다. 하나님마저도 영향을 입히고 싶은 인물이 되고 싶어한다. 여전히 기대와 희망과 믿음은 오직 자신이 실제로 행하는 일에다 걸어 놓고 있다. 이런 삶의 원리만이 이 세상에서 보편적 진리로서 유통되고 인정받는다. 모든 학문이 이런 정신 하에 실시되고 있다. 학문의 업적이 인류 사회 번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해서 하늘의 진노가 풀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행한 육체의 일을 구경하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물은, 자기 행함과 그 가치성에 대해 부정하는 자이다. 단지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겸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인간이 끼어 들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가 바로 믿는 자이다. 그러나 세상 편에서 볼 때 이런 자를 가치있게 보지 않는다. 인간 세계가 필요한 인물은 얼마나 많은 많은 일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느냐로 판가름된다. 조그마하고 유명하지도 않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인물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본인의 행함의 능력과 실적에 의해서 그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안목을 따로 소개하고 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고후 6:8-10) 하늘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오 산 자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계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 유명한 자'라는 세상적인 공식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무명한 자'가 오히려 합당한 공식이다. 이 공식은 인간들에게 있어 사활에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원리를 모독하고 있고,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원리를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삶이 사실 성도에게 주어진 신앙의 능력이다. 이들 만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이유를 알고 있다. 참 성도는 대중들의 눈총과 불평을 안중에 두지 아니한다. 스타가 되기 보다는 바보이기를 원한다. 자기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는 바보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은 바보는 지옥가는 총기있는 자보다 더 지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