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성과 변화
사람의 본성과 변화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한다. 그것이 잠 잘 때 꿈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갖가지 취미 활동을 통해 표면화되기도 한다. 취미 활동이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심성 안에는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심이 늘 들어 있다. 기존에 것에 대한 해체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열의는 자신의 육체가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강렬하다. 따라서 변화에 대한 추구는 모두 육체적 에너르기의 발산에서부터 비롯된다. 왜 안정적인 것에 대해 쉽게 식상하는가? 왜 완성된 것을 미워하는가? 인간들의 기존에 것에 대한 반발은, 진리든 선이든, 무엇이든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는 한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때문에 일어난다. 뭐든지 본인이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어야 만족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따라서 아무리 선한 것이고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면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닌 것을 거역하는 어쩔 수 없는 본심 때문에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끊임없는 시비와 도전과 해체와 파괴가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으로 자리잡고 만 것은 자기 이외는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곧 자기 내부에서는 자아가 확고한 믿음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은 자기 속에는 곧 신이다. 따라서 뭐든지 할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 진리에 대한 판단, 선에 대한 판단, 악에 대한 판단, 사랑과 믿음과 소망에 대하여 최종 판단을 내릴 권한이 자기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신이란 바로 그 어떤 행위나 생각에 있어 더 이상 지시 받을 대상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자아'라는 신을 계속 신으로 행세되기 위한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외부와 투쟁을 벌리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인간이 외부의 신을 스스로 도입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사실상 그 신을 자신의 하수인을 부려먹기 위해서이다. 어느 정도 쓸모 있다고 여길 때까지 말이다. 따라서 신을 스스로 믿었다고 자청하는 자들이야말로 자아의 전지 전능성과 독보성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자들이다. 얼마나 자아가 위대하고 겸손하고 총기가 뛰어났으면 스스로 알아서 옳은 신을 선택할 줄도 알고 스스로 신에게 굴복할 줄도 아는가 말이다! 인간이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은 일종의 삶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자아라는 이름의 신의 다양한 변신이다. 이것은 삶의 권태에서 일탈해 보는 획기적인 용단에서 비롯된다. 변화의 주체가 여전히 자아가 확정되어 있는 이상, 남의 종살이 한다고 해서 자아가 뭉개져 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도 또한 자아라는 신이 여유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신을 찾고 신과 거래하는 종교 생활과 더불어 더나아가서 윤리와 도덕으로 자아를 늘 재무장하는 것은 마치 여인들이 아침마다 세수하고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행위와 같다. 변화 속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위상을 분명히 확인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모험과 실험을 일생 동안 조심스럽게 시도해 본다. 이미 나름대로 신은 확보해 놓았다는 자신감이 이런 변화를 무리 없이 실행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류에게 있어 종교란 인간의 신 됨을 보다 더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계기로 작용할 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종교 생활에 열중해도 인간은 자아가 신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구원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자아를 포기하고 자기가 믿는 신의 품에 안긴다 할지라도 그 품안에서 여전히 자아는 신의 위상을 그대로 존속하게 된다. 결국 인간에게 주어질 것은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극구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자아는 결코 죽을 수 없다는 영혼불멸설이나 붙들고 죽음의 신에 대항하여 최후의 발악을 해보는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신이라야 말로 참된 신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아드님으로 오셨다. 그분이 달린 십자가가 말씀하는 바는,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며 참된 하나님은 따로 있음을 보이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