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부활
율법과 부활
부활에 관해서 사람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좋은 느낌으로 대하게 만든다. 마치 부활을믿기만 하면 모두 다 부활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모두다 영화로운 부활의 해당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 불멸설을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 불멸설이나 육체 영속설을 주창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언급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해서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는 이런 성격의 부활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람은 성경에서 자기 쪽에 유리하다고 여기는 사실만 골라서 진리의 꽃다발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부활의 경우도 같은 현상을 보인다. 그러나 십자가를 거부하면 필히 부활도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이며 여기에 비밀이 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사도 바울은 부활을 내다보면서도 이 현실에 있어 부활의 바탕은 오직 고난과 죽으심에 참예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예수님이 왜 부활되셨느냐 하는 문제와 자기가 왜 이 땅에서 꼭 죽어야만 하는 가를 연관시켰다. 자신의 죽음과 무관한 부활은 막연한 공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죄로 인해 죽음을 본질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영화로운 부활을 소망하는 자들은 자신의 영원한 저주와 심판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제시된 평가임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활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구원받는가 에 대해서 해결책으로 제공되는 사건이 아니라 어떤 자만이 영화로운 부활에 참여되는가를 확인해 주는 사건이다. 여기에 십자가 사건이 핵심으로 등장된다. 십자가를 유발시켰던 그 율법 차원의 일 처리가 부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같이 적용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사망이 없는 부활은 생각치도 못한다.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건을 무효로 돌리는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중심 내용으로 함유시키는 사건이다. 율법은 율법대로 승리해야 했다.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는 충분히 달성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발생된 사망에 대해서 이번에는 하나님은 부활 사건을 마련하셔서 율법 말고 다른 차원의 세계를 시작하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마저 이기는 분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것이 부활 사건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믿음도 껍데기만 있고 본 알맹이가 빠지는 격이 된다. 실내용이 없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권능도 이긴 것이 됨을 뜻한다. 그렇다면 한다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와 정죄도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극복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사망은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삼키어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도 다 저주 아래 잠잘 것이 아니요 주님 안에서 하늘의 형상으로 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때부터 새 세계가 열린다. 율법을 이긴 자로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율법과 사망이 더 이상 관여 못하는 신분으로 영원히 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인식은 이 지상에서 십자가 의의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은 십자가 길로 간다고 했다. 십자가 안에서 자신의 저주와 사망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만이 부활에 참여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율법에 의해 정죄함에서 벗어난 흔적으로서의 십자가이다. 만약 아직도 율법적 정죄을 당하는 위치에서 사는 자라면 영광스러운 부활과는 요원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