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풍경
예배 풍경
예배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뭣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을 느낀다. 누군가 시범조로 파격적인 요소를 먼저 터뜨려주기를 기다린다. 공간과 시간의 파열을 신호로하여 신에게 엎드릴 준비가 되어있다. 짧은 시간이나마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하나님편이라는 점을 신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더러운 이 사회의 범죄에 대해서 성토할 만반의 준비도 되어 있다. 정의로움을 선창할 인사가 어서 강단에 등장하기를 고대한다. 이 예배 시간만큼은 정의가 승리하는 영역임을 서로들에게 뽐내고 싶어한다. 드디어 선량하게 생긴 인물이 무거운 색채의 가운을 입고 등장된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권위가 움직이는 것 같다. 정의로움이 온통 그 사람만을 졸 졸 따라 다니는 것 같다. 드디어 불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종이 울린다. 그 순간부터 이 인물은 신의 영매자가 된다. 자신이 강단 중심에 서 있음으로서 이 순간 신이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군중들에게 선포한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앉아 있는 이 장소에 벌써 신이 와 계시다는 느낌에 바짝 긴장을 한다. 이제부터 구경할 것은 신의 에너지가 강단 중심에 서 있는 영매자에게 어떤 식으로 임하고 있다고 있느냐를 관찰하는 일이다. 강단에 서 있는 사람은 입에서 불을 토한다. 그는 땀을 흘리고있다. 그는 지금 악마와 싸우고 있는 중이다. 신적 에너지에 충만해서 악의 에너지를 기력을 다하여 물리치고 있는 중이다. 강단 밑에 있는 일반 군중들은 설교자의 분노에 같이 동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악마와 한 통속으로 간주된다. 설교자는 사회악에 대해서 드디어 화가 폭발하듯 내뱉고 있다. 강단 밑은 군중들은 신의 정의로운 활성화에 기가 살았다. 악을 때려부수자고 서로들 선동한다.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며 설교자의 원기를 북돋우어 준다. 설교자의 자아 도취는 막바지에 이를수록 극에 달한다. 악에게 패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고통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고 선포해 버린다. 민중들은 지난 주간 동안 일어난 일들 속에서 자신의 과오를 찾아내고 재점검하기에 바쁘다. 철저하게 찾아내어 죄악을 빠뜨리는 실수는 하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 정화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에 선 신의 중매자는, 스스로 정화하는 방법에 대해서 빠뜨리지 않고 소개하므로 그의 설교의 대미를 장식한다. 큰 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신으로큰 매를 맞기 전에 먼저 자신이 심판 행위를 일차적으로 수행해버리라는 것이다. 일종의 백신을(면역을 위한 예방 접종) 맞으라는 것이다. 사소한 악을 자기 내부에서 발췌해서 그 악에 대해서 선으로 처방해 버리는 기술을 습득하는 방식이다. 백신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새벽 기도회 나오기, 십일조 하기, 교회 봉사 일에 충성하기, 당회장 목사에 대해서는 가만히 숨어서도 비난 안하기, 전도 열심히 하기, 성경 읽기를 빠뜨리지 않고, 제자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기, 예배당 건축을 위한 목돈 마련하기, 작정한 선교 헌금을 빠트리지 않고 선교사를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해 주기, 등등이다. 군중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큰 고행이며 말로만 듣던 십자가의 무거운 짐인 것을! 하지만 자기가 지은 죄가 이런 백신으로 신의 징벌을 사전에 차단하여 고요한 남은 여생이 보장이 된다면 무언들 못하랴! 신의 정의로움이 예배당 안에 눈 부릅뜨고 살아 있으니 감히 스스로 악마 편이 되어 악역을 담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든지 좋게 좋은 것이 아닌가! "나도 불의를 미워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를 악을 쳐 부시는 정의의 십자군으로 간주해 주소서!" 이것이 군중들의 소박한 희망이다. 사기란, 모든 것이 인공적이다. 아무리 악에 대해서 분노를 토하고 사회 정의를 외쳐도 그 밑바닥에는 자아에 위대함에 대한 미소가 스며 나온다. 참된 예배란,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공적인 것이 부정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영역이다. 인간들로서 어떻게 연출해 낼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되지 않을 때, 대신 나타나는 것이 속임수 예배이다. 왜냐하면 속임수만큼은 늘 똑같은 장소에서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