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소명도 기술인가?
목회 소명도 기술인가?
기술이 돈이 되는 시대를 절정에 이르렀다. 뭐든지 남들에게 보여줄 기술이 없으면 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기술 전성 시대에서 있어 인간 됨이란, 기술인이 되는 것이다. 대인관계 있어 사랑이 우선이 아니라 기능과 기술의 교환이 우선이 되어 버렸다. 상대방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얻을 것이 있는 그 기간만큼만 사귀는 시대이다. 결혼도 연애도 이런 유형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이런 모습으로 충만하더라도 참된 교회는 따라가서는 안된다. 참된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오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섬김으로 가능할 뿐이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11)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1) 그런데 인간이 기술인으로 변하여 살아가는 것은 오직 자기를 영화롭게 존속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자아+소유물=자기 영광성' 이라는 공식 안에서 살아가는 식이다. 기술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자아의 가치를 더욱 더 고양시키는 근거가 된다. 반대로 말해서 기술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자아의 가치가 메말라 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은 예수님의 원하는 인간형을 정면으로 대립된다. 이 원인은 모든 것을 기술 위주로 인간을 평가는 발상 때문이다. 신학교나 목회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적으로 봐서, 소명이란 십자가에로의 소명이지 결코 또 하나의 기술자나 기능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은 자기가 마치 남들이 갖지 않는 특별한 종교적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리고 자기보다 설교를 더 멋있게하는 자를 보면 질투가 나서 못견딘다. 평소에 기능과 기술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려는 기술적 존재가 이미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사 자체가 기술적으로 인간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공격하고 정죄하면서 다가온다. 즉 스스로 고도의 종교 기술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보려는 이러한 추악한 생각을 향해 하나님의 은사는 사정없이 공격을 감행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모두 십자가 정신에서 배출되기 때문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정신이 없으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온 은사가 아니다. 이것은 자신을 또하나의 신으로 신봉하고자 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성경이 이것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회 세계에서는, 자기가 특별히 개발하고 받았다는 희한한 종교 재주들을 총동원하여 교인들을 흥분시켜 자기 사람으로 삼으려고 한다. 이로서 신학교는 종교 기술 학원이 되고 말았다. 방언 기술, 전도 기술, 제자 훈련 기술, 평신도를 깨우는 기술, 기도를 멋지게 하는 기술, 찬양 인도 기술, 강해 설교 기술, 매끄러운 사회보는 기술, 성경을 빨리 보고 많이 외우는 기술, 남을 돌보고 구제하는 사랑의 기술, 상담을 위한 심리학, 심지어 놀랍도록 희생적이고 순교적이고 감동스러운 윤리와 도덕까지 동원시키지 않는 것이 없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참된 하나님 나라는, 기술로서 자아를 가리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 것은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말한다. 있는 교회 키우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이 아니다. 목회자는 복음 안에서만 목회자일 뿐이다. 교회 안에서만 산다고해서 목회자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비극은, 하나님 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