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남과 여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여자는 생명의 원조로, 남자의 흙(죽음)의 원조로 나온다. 여자의 이름은 하와(생명)이지만 남자의 이름은 아담(흙)이다. 하나님은 최초의 남자와 여자를 사용하여 생명과 죽음의 본질을 우주에 그리고 계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창세기 3:15에 등장하는데 남자의 후손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남자는 이미 죽음의 상징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와 뱀 사이에서 최초로 발생된 죄악의 결과에 의해 변질된 속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생명을 저지하고 반발하고자 자신이 함유하고 있는 죽음의 힘을 가지고 여성을 지배하게 된다. 여성은 강한 남성의 힘 아래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으로부터의 지배당함이다. 그러나 여성은 그 죽음의 폭력을 오히려 생명으로 승화시켜 버린다. 생명을 훼손하고 짓밟고 뭉개 버리는 남성의 폭력을 받아 그 죽음을 자기 몸 안에서 생명으로 열매 맺게 한다. 간단히 말해서 '임신'이다. 여성은 자기 몸의 임신을 위해 남성을 찾아 나선다. 생명의 씨앗을 구하는 것이다. 죽음의 재료를 가지고 생명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죄가 인간 세상을 들어옴으로 죽음이 찾아왔고 인간을 대표하는 남성은 폭력적인 죽음의 화신이 되어 생명 되는 것은 모조리 정복하고 없애 버리려 하지만 여성은 그 와중에서 도리어 약한 몸으로 생명을 일구어 내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 셈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씨를 가지고 생명의 씨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여성 안에 무슨 속성 때문일까? 그것은 '해산하는 고통'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날 약속의 자식은,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그 죽음의 힘 때문에 주어지는 고통을 고스란히 담아 내는 자식이다. 어머니가 임신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는, 그 어머니로부터 태어날 생명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죄의 고통이 들어 있는 채 태어난다는 말이다. 어린아이가 운다는 말은 아파서 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품이 곧 생명의 원동력이 됨을 드러내면서 운다. 울지 않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다. 이 말은 곧, 죄의 고통이 담겨 있지 않는 목숨은 진정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 운명은 이로서 고통과 슬픔의 덩어리라고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생활에서는 죄의 두 모습을 늘 보여주게 되는데 하나는 죽음의 폭력에 의한 피해를 보면 약한 자의 신음 소리와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의 힘에 늘려서 땀 흘리며 고생하는 인간의 신음 소리이다. 하나는 여성의 몫이요 다른 하나는 남성의 몫이다. 둘 다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얻어진 형벌들이다. 남성의 노력은, 더 이상 죽음에게 끌어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인 것에 반해서 여성의 노력은, 새로운 생명을 기어이 만들어 내려는 몸부림이다. 한쪽은, "죽어서는 안돼!"를 외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자식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이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남자는 강하다. 이 모두는 비유이다.
여자에게 있어 남편은 생명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만 자식이 생기고부터는 자신도 흙이요 시체로 돌아선다. 새로 난 약한 생명이 이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희망의 희망이요 기쁨으로 등장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침묵한다. 생명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과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아품에 대해서도 입을 다문다. 남성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날 생명에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또한 새생명의 탄생을 보고 자식을 품 속에 안아봄으로서 약함에서 오는 여성의 위대함과 창조적 가치를 알아보게 된다. 그동안 고통을 귀하게 쳐준다. 이로서 모든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약속이 적용되는 범주 안에 놓여있는 운명자들이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죄로 인한 죽음의 고통을 친히 경험하셨다. 동시에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신 약속의 아들이기에 생명이 되신다. 그 생명은, 악마로부터의 공격을 약한 몸으로 받아 낸 고난과 희생을 담겨 있는 생명이다.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아시는 분으로서 이제는 손수 생명을 창조해 내시는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