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숙하는 삶 근신하는 삶
자숙하는 삶 근신하는 삶
"교만하다"라는 표현은, 자숙하고 있는 죄인에게는 결코 해당될 수 없는 말이다. 자숙하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멋을 부리지 않는다. 자숙하는 자의 웃음은 감사의 웃음이지, 호탕하거나 음탕한 웃음은 아니다. 자숙하는 자의 눈물도 감사의 눈물이지, 하늘에 대한 원망과 한맺힌 통곡이 아니다. 자숙하는 자는, 자유가 어서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스스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없으면 없는대로 자유하고 있으면 있는대로 자유한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 자숙하는 사람은 자기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차압당한 실정이다. 목숨까지 빼앗긴 상태이다. 따라서 다시 살려 달라는 호소를 하지 않는다. 그저 살려주는 삶을 살 뿐이다 자숙하는 사람은 종교라는 것을 모른다. 무종교자이며 비종교인이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도 없다. 그저 날마다 자숙하고 있을 뿐이다. 자숙하는 사람은 시킨대로 사는 사람이다. 로봇에 불과하다고 주위에서 놀려도 화내지 않는 자이다. 자숙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자숙하는 사람은 과거를 즐거워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름다운 과거를 잃어버렸다고 울거나 다시 돌려 달라고 하늘을 행해 떼 쓰지 않는다. 자숙하는 사람은 미래를 보장하라고 데모하지 않는다. 미래가 과연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다. 미래란, 콧잔등 위에 늘 붙어 있는 안경과 같이 영원히 환상임을 아는 자이다. 자아가 죽은 자에게 더 이상,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의미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현재 뿐이다. 자숙하는 사람은 용서를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무게만큼이나 항상 더 크다는 사실을 또한 아는 자이다. 자숙하는 자는 주님의 용서를 깊이 알기 위해 자기의 죄를 깊이 알려고 하는 자이다. 자기 죄를 찾기 위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자신의 윤리가 죄이며, 자신의 도덕이 죄이며, 자신의 전도와 설교와 기도와 봉사와 헌신과 금식과 충성과 헌금이 죄임을 아는 자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과 소망과 믿음과 순교와 절제와 구제와 겸손이 또한 죄악된 것임을 아는 자이다. 자신의 죄 인식으로부터 죄를 꺼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죄를 발견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랑과 의는 오직 그 십자가 달린 예수님 뿐임을 아는 자이다. 따라서 자숙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인정하지 않은 걸까? 바로 여기에 자숙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와 저주와 분노와 영광성 앞에서 자숙하는 것이다. 수시로 변모하는 세월따라 자숙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하게 마주 대하는 숱한 사람들 속에서 자숙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득에 따라 때로는 움추리고 때로는 용감하게 등장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요령부리기'를 할 줄 모른다. 자숙하는 사람 속에는 늘 자숙케 하는 사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다. 어느 장소, 특수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사라질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결혼식에서나 파티 장소에서나 남에게 선을 베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한다. 자숙하는 자에게 '성공'이라는 단어는 적용될 수 없다. 자기 것, 자기 계획이라는 것이 이미 없기 때문이다. '잘되어 가는 자숙 태도' 때문에 축하 받을 것을 것도 못된다. 오직 모든 영광은, 자숙을 시키시는 주님이 받으셔야만 한다. 세상의 각종 윤리와 종교교리가 있다 할지라도 성도에게만 진정한 자숙이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을 그들만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자숙을 유발할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큰 선을 했을 때는 상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지시 따라 사는 이런 자들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취미와 즐거움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지 결코 늘 자기 자숙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슬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슬데 있느니라 너희가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