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돈
왕과 돈
이 시대에는 분명 전권을 쥔 왕은 없다.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을 종으로 여기던 것은 옛날 옛적이나 있던 일이다.그때는 주로 목축이나 농업이 주종을 이룬 때이다.그 당시 왕이나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곡식과 물고기와 우유와 생산물을 제공받았다.왕과 성직자들은 직접에 노동을 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은 풍부했고 여유있었다.상대적으로 백성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왕과 귀족이라는 계층과 백성이라는 계층으로 간단하게 둘로 나뉘어지던 때의 이야기이다.이제 왕은 사라졌다.그렇다면 모든 결실물이 농민와 어부와 광부와 목축자의 몫으로 되돌아갔는가? 그렇지 않고 옛날에는 왕과 성직자는 그저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농부와 다른 일을 했을 뿐이다.왕은 외교와 전쟁과 치안과 조세 행정에 관한 일을 했다.그런 일들의 책임자였다.성직자는,행운과 요행을 발생시키고 자연을 잘 구슬려서 재앙이 축복으로 전환되도록 선한 일을 가지고 하늘에다 압력을 가하는 일을 했다.직접 땀흘려 자연을 개발하지는 않았지만 생산량을 증대하여 풍족한 삶을 하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준 일을 했다.그래서 백성들이 수확한 생산물의 일부에 자기 것으로 삼았다.문제는 얼마만큼 가져가느냐 하는 것이다.왕이란,다 가져가는 존재이다.성직자도 사실 왕의 보좌관에 불과하다.왕의 것의 일부를 녹으로 받을 뿐이다.왕이,국가의 전부를 가져가는 것이 과연 당연 처사인가를 따져 봐야 한다.백성을 위하여 행정적인 봉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독차지까지 할 자격까지 되는가?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 되고 백성들은 왕의 토지를 공여받아 갈아서 농사지어 토지 주인인 왕에게 값을 치르게 된다.수확물의 일부만 치른다고 백성들이 자기 땅이라 간주하지 않는다.으레히 땅의 주인은 왕이다.결코 왕이 전 백성들을 협박해서 땅을 뺏은 것이 아니다.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어쨌던 한 나라의 주인은 누가 되던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심적 종속성이 발동하여 백성들 스스로 왕의 것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즉 나라는,지정한 왕 개인의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직책의 것이다.만약 누군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의 자리를 잡아도,백성들은 생각하기를,나라는 그 사람 개인의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추상적인 직책의 것으로 본다.왕이 국가를 대표하는 대표자일 뿐이지 결코 왕 개인의 것이 아니다.그렇다면 오늘날 왕의 직책이 사라진 민주주의 국가들에 있어서 국민들이 지상의 땅이 누구의 것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가? 오늘날 민주주의란 기실 자본주의 체제 위를 덮는 포대기에 불과하다.아무리 노동의 종류가 수천 가지,수만 가지 분화되어도 그 모든 것은 하나의 권세 안에서 상호 연결되어 있다.그 권세자는 돈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했다(마태복음 6:24/누가복음 16:3).하나님은 자신의 라이벌로 돈을 지정하셨다.옛날의 이방 민족들의 왕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의 하나님의 라이벌이었다.그런데 이제 그 왕은 공중에서 분해되고 그 왕의 파편들이 지상에서는 돈으로 구체화되어 떨어진다.이렇게 볼 때,옛날에도 역시 왕이라는 추상개념은,재물의 의인화이다.흩어져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놓고 볼 때 그것은 곧 인간들이 이상이 실현된 것으로 믿고 싶어한다. 그 앞에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찬양하고 싶은 것이다. 겉으로는 왕이었지만 속으로는 백성들의 자기 노력의 열매들이다.이제 왕 제도가 사라진 판국에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모든 가치는 곧 돈이 어느 정도는 풍족하느냐 여부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이것만이 이 시대의 대화 체널이다. 모든 대화는 최종적으로 돈 거래로 끝난다. 모든 인간은 돈에게는 언제든지 굴복한 준비가 되어 있다. 옛날에는 구체적인 인물인 왕에게 얼마나 충성했느냐로 생존과 생계가 가능했다.그러나 이제는 돈이 말을 한다. 그 인간의 신용도는 동원시킬 수 있는 유효 자금의 양으로 결정된다. 옛날 보다 오늘날이 더 타락했다는 말이 아니다.옛날보다 더 솔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정말 예수님을 유일한 왕으로 모신다면 기존의 돈이라는,하나님의 라이벌 품 안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