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에서 흙으로
황금에서 흙으로
발전,성장,부흥,번창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흥분한다.모든 사태가 늘 향상되기를 원한다.지금보다 나아지고 있다는데 희망을 건다.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론 교리 중에 성화라는 게 있다.예수 오래 믿으면 점차 사람이 거룩해진다는 교리이다.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간다는 이론이다.한마디로 말해서 성숙에 관한 이야기이다.그러나 이 교리는 교인들의 기분을 맞추어주려는 이론이지 결코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왜냐하면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점 점 나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아무리 좋은 것을 믿고 도를 닦아도 전에 있던 위치에서 한 치도 변화되지 않는다.역시 옛 모습 그대로이다.인간은 달라지는 법이 없다.성불이라니 성화라는 하는 것은 기분 상 그렇게 느끼고 싶어하는 소망을 드러낸 것뿐이다.실제에 있어 전에부터 꿈쩍도 안하고 있다.맨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니엘 2장에 보면,느부갓네살 왕이 금신상 꿈을 꾸게 된다.머리는 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철과 흙으로 되어 있는 신상이다.이 금신상은 어디선가 날라오는 돌멩이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이 금신상은 짐승 같은 인간 나라를 말한다.곧 인간 세계의 실체이다.인간은 자신이 금인 줄 알고 살아간다.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앞에서 자기가 은과 놋과 철에 불과함을 알고 급기야는 그 정도로도 아니라 종국에는 자기는 흙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이것이 죽음이다.흙으로 만들었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이점을 깨닫는다고 흙 아닌 것이 되는 게 아니다.여전히 흙이다.처음부터 흙의 본성과 본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인간은 바위섬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그리고 계속 있다.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 앞에 서기를 거부하는 자들은,자신에 대해서 위장하고 있다.마치 황금이나 다이야몬드 같은 인간 인줄로 안다.교회에 들어와서도 계속 착각 가운데 살면서 이 황금 같은 자아를 더욱 광나게 하려고 설쳐댄다.점차 거룩하고 깨끗하고 위대하게 된다는 성화 교리에 독려되어 스스로 다듬어 나가기에 바쁘다.절제하려하고 온유하려 한다.자기가 자기에게 시술하는 성형 외과 수술이다.이건 기독교가 아니다.십자가 앞에 바로 서야 한다.흙에서 황금으로 변하는 게 아니다.예수 믿고 난 이후에도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죄인의 모습이다.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는 더 이상 죄인은 없다.하지만 의인의 모습을 가진 사람도 역시 없다.모두 다 죄인의 모습 그대로 지니고 살아간다.그래도 의인이다.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믿는 자'라고 한다.믿는 자의 특징은,자신의 본색을 십자가 앞에서만 규정하는 사람이다.즉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규명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피흘리시는 그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을 이해하려 하는 자이다.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날 밤에,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양 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다.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결코 나의 윤리 수준에 의해서가 아님을 아는 자가 의인이다.윤리적으로 나아진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는,살면 살수록,날이 가면 갈수록 그 동안 안 들킨 죄에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일반 사회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신자 자신은 자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입이 백개라도.
반복되는 반성이나 회개로도 땜질이 되지를 않는다.인간은 죄로 단단하게 뭉쳐져있고 빈틈없이 다져져 있다.죄의 영향권 밖으로 멀리 달아날 수도 없다.자기 몸뚱이가 죄 근원지이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자를 의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여전히 "예수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예수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시선이 바로 쪼이는 곳에 늘 머문다.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기를 위인으로 여길 수가 없다.많은 다른 죄인들과 같은 모습을 지닌 한 사람으로만 볼뿐이다.새로운 피조물이란,예수 안에서 사는 자이다(고린도후서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