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예로부터 두려움이란 무지에서 발생된다고 했다.번개를 치는 원리를 몰았던 시절에는 번개 치는 날이 두려웠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그런 것들의 불길한 신의 징조로 해석되었다.그래서 개화된 세상이 되어 숨어 있는 모든 비밀이 다 드러나는 시절이면 두려움이란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었다.아무리 깊은 학문을 습득해도 두려움이란 지워지지 않았다.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업의 주체를 인간 자신으로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장래에 대해서 어둡다.과거가 아무리 화려하고 요란스럽게 칭송 받았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일,또 해야만 하는 일이 현재에 떨어져 있다.무엇인가 장래를 만들기 위한 선택할 일이 항상 코 앞에 놓여 있다.뭘 어떻게 선택해야 보다 나은 장래가 보장되는가? 이점에 대해서 망설이게 된다.이것이 두렵다.지나간 자국은 이미 무지 상태가 아니다.하지만 한 치의 앞은 여전히 인간 모두에게 닫혀 있다.그래서 인간들은 이 예측력을 높이기 위해 과거를 연구한다.미래는 과거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과거로부터 뭔가를 배우기 위해 몰두한다.성경에 봐도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다"고 되어 있고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나 간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라고 되어 있다(전도서 1:9/3:15).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과거란,인간들의 성공 사례가 아니라 인간들의 실패 사례에 관한 것이다.지혜를 가지고 세상 전부를 파악해서 장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노력은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도 계속 시도하는 인간의 본질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그 지혜 가운데서 맹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전도서 12:13-14).심판을 고려치 않고 발전,발전만 염두에 두고 몸부림 쳐 봐야 모든 것은 헛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전도서의 흐름이다.스스로 세상을 알아서 대처하겠다는 인간들의 의지는,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과 충돌된다.심을 때가 따로 정해져 있고 거둘 때가 따로 정해져 있다.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심판을 도외시하고 일을 감행하는 것은,불확실한 결정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과거의 결정이 만약 미스였다면 미래는 보나 마나 실패이다.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미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잘못 접어든 인생,과거 탓만 할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반성해야 하는 이유는,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만약 과거의 행위로 말미암아 오히려 사태가 호전될 수도 있다.이럴 경우에 누가 잘해서 얻어진 행운인가? 결국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출은 하나 밖에 없다.그것은 사건의 주체를 하나님께 돌리는 일이다.누가복음 12:4-5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여기서 예수님은 두려움의 원인을,인간 자신에게 두고 있다.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두려움을 유발시키는 일이다.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 손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손에 의해서 결정 나는 게 아니다.어떤 일이 발생되면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려 볼 필요가 없다."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사태를 안겨 주시는가?"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그리고 난 다음에 다름과 같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하나님,이런 상황에서 제가 할 다음 일을 무엇입니까? 시키시는 대로하겠습니다." 그 사명이 분명 자기가 남들에게 살해당할 수 없는 외통수라 할지라도 두려워해서는 아니된다.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사명은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뿐이다."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로마서 13:8).미래 속에 미리 들어 있는 심판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생존 때문에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