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의미와 십자가
생의 의미와 십자가
단순히 살아 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무작정 살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생존보다 더 큰 목적을 원하시는 게 하나님이다.목숨을 던져도 좋을 만큼 좋은 일을 위해 살기를 원하신다.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찾기 못했을 경우에는 계속 기존의 목숨에 애착을 갖는다.목숨 부지를 유일한 인생의 목표로 했을 때,여기에서 드러나는 허점들을 생각해 보라! 흔히 성공이라고 붙이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모두 다 목숨 연장책에 불과하다.자기 목숨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성공에 중독된 자는 어두운 그림자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마치 색다른 인생이라도 새로 시작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성공의 일을 쪼개고 또 쪼개어 분석해 보면 거기에도 역시 생명 연장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 들어있다.뭔가를 부지런히 설치고 헤매고 다니면서 사업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그 쉴 새 없이 하는 일이란 고작 주변에 널려있는 빈 광주리들을 들춰보는 일이다.호기심을 가지고.행여나 여기에 행복이 있을까 아니면 저 광주리 속에 행복이 있을까? 물론 광주리를 일단 들추는데는 성공한다.세상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고 늘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부러워한다.그러나 들출 때마다 누군가가 이미 실망하고 돌아 선 흔적만 발견할 뿐이다.인간은 조상 아담으로부터 허무한 인생을 물러 받았다.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계속 나는 이상한 목젖을 달고 나왔다.보아도 보아도 호기심이 끝이 없는 고장난 눈동자와 손끝을 지니고 태어났다.덧없도록 짜여진 육체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인생들이 그 육체로서 만족을 거두기 위해 오늘날 피곤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인생이란 어차피 실패로부터 시작한다.그리고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포부와 뜻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에서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수많은 성공이 전체적으로 인생에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패이다.예수님은 인간들의 실패에 가담했다.예수님이 제대로 가담하셨다는 점에서 대성공이다.그렇다면 성도도 필히 예수님이 보여준 인간의 실패에 가담해야 한다.거기에 있을 경우에만 예수님만 만난다.그리고 교제가 가능하다.예수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인생 실패에 대해서 깊은 맛을 보아야 한다.그렇지 아니하면 인생의 근본을 모른다.인생의 근본을 모르니 성공이라는 단어를 찬양한다.예수님과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이다.이래 가지고서는 예수님과 교제가 안된다.예수님은 실패자의 모습을 하고 다가오는데 자기는 세상적으로 성공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마중 나가려 하니 제대로 만날 수가 있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다가오시면 성도 자신도 십자가를 지고 나타나야 한다.십자가를 지는 자세는,실패한 본연의 자세이다.정말 십자가를 사랑하는 자라면 자기가 벌려놓은 모든 사업 속에서 자신의 죄를 파악한다.자기가 쏟아놓은 정열은,십자가로 가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실패를 두려워해서 저질은 일임을 인정하게 된다.일이 소록소록 성공될 때마다,십자가를 소록소록 잊어간다.나중에는 십자가를 싫어한다.흔히들,성공을 기약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십자가 지고 간다'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십자가를 충분히 모독하는 언사이다.또 교회 일을 하면서 힘든 경우가 있을 때도 십자가를 운운하는데,교회를 통해 자기 성취욕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십자가하고는 완전히 무관한 정신이다.십자가는,오직 자기의 죄를 끄집어내기 위하여 자기를 칠 때만 사용해야 한다.참되게 십자가를 이해하는 성도라면,성공을 포기한다.성공할 자격이 없다는 점을 수용하기 때문이다.자기가 일생을 통해서 반드시 남길 수밖에 여러가지 일 속에서 자신의 추악과 탐욕을 발견한다.교회 내에서 주의 위해 했다는 모든 설교와 찬양과 전도와 봉사의 모습 속에서 비쳐져 나온 자신의 악마성을 솔직하게 인정한다.십자가를 져야 비로소 구원에 성공한다는 게 아니라 마땅히 십자가는 내가 져야만 하고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성도이다.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성도 생애의 의미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