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대받는 영생
천대받는 영생
죽은 자를 누가 살릴 수 있을까? 인간들은 그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그러면서도 항상 남아있는 급선무는 영생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의 움직임은 정말 영생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을 벌리고 있다.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이냐?(마태복음 16:26).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호에 와서 영생 대신 딴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다.영생 대신 사업번창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영생 대신 교회 번창에 입맛을 다신다.영생 대신 선교사로 파견되어 가족들의 안정된 생계 보장된 것을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거지 나사로가 정말 놀고먹는 거지임을 교인들은 잊고 있다.인간들은 창피한 것을 죽음보다 더 못 견뎌낸다.남들로부터,우리 조직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보람으로 여긴다.영생보다 더 귀한 것들을 찾아 헤맨다.여성들은 가정의 화목과 평안을 영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모든 것이 없어지고 순식간에 사라진 그 공터에 서서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린 욥의 이야기를 기억조차 안하려고 한다.설사 욥을 연상하더라도 그의 말기에 두 배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구미를 가져서 일시적인 시련을 합리화하려 한다.목사가 목사 자리를 그만 두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영생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장로가 장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영생을 크게 여기지 않고 있다.어디 가서 영생을 현 목숨보다 오히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대하게 될 것인가! 말세에 영생을 천대시 한 만큼 심판이 주어진다.하늘의 저주는,주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이에게 내려진다(고린도전서 16:22).평시에 주의 이름을 많이 부르고 적게 부르고 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선에서 주님과 만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어떤 마음이 되어야 적어도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가? 성경에 보면,목숨을 다하는 것과 마음을 다하는 것과 힘을 다하는 수준을 사랑이라고 표현했다(신명기 6:5).사랑은,딴 데 눈독들이지 않는다.오직 사랑의 상대만을 보고 산다. 예배당이 커지면 커질수록 또 하나의 거대한 우상이 점차 확대되는 것이다.예배당이 하나씩 신축될 때마다 소속된 교인들은 그 건물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경축하고 자축하고 있는가! 마치 시내산 밑에서 여호와 축제 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예배당이 확대될 때마다 비례해서 교인들의 마음속에서 거대한 공룡 같은 우상이 커지게 된다.일시에 거대한 조직체를 무심히 버리고 외면하기에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다.우상은 밖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속에서 날마다 조금씩 싹터온 것들이다.이 거대하고 참한 우상 건립을 위해 긴긴 세월을 마음 조려가며 고생했었다.먹을 것 줄여가며 헌금했고 쓸 것 안 쓰면서 푼푼이 돈을 모았고 그것도 불안해서 금요일마다 예배당 마룻바닥에 엎드려 철야하면서 신의 도움을 철저하게 요구한 결과로 오늘날 이 거대한 바벨탑들이 세워진 것이다.그러므로 그 우상과 그 조직체를 어찌 일시에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교회를 극복한 목회자가 진정한 목회자이다.참 목회자는 조직보다 인간 됨에 관심 있다.왜냐하면 하나님이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과연 합당한 인간이냐를 하나님은 되묻고 있다.거기에 비한다면 조직으로서의 교회와 예배당이라는 부동산은 인간들의 탐욕의 결집으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난다.탐욕은 곧 우상 숭배이다(골로새서 3:5).한평생 자신을 우상으로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아놓고서는 주님만을 사랑했노라 거짓말한다고 지옥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차라리 거지 나사로가 되는 게 낫다.차라리 불구자가 되는 게 나을 것이다. 영생은 예수님만이 제공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분의 십자가 피로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다.영생을 천대하는 자는 그분의 희생을 모독하는 이방 종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