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22 부산강의-가다머 녹취
20051122 부산강의-가다머 녹취
이름 : 한윤범(IP:61.73.49.68)
20051122 부산강의-가다머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까지는 딜타이란 사람 했지요. 딜타이의 주안점은 뭐냐 하면, 역사라는 것은 역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진리가 모든 의미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역사 안에. 역사 안에 들어있다는 말은, 장래를 다 안 살아보고 짧은 인생을 살면서 알기는 뭘 아느냐 하는 거예요.
짧은 인생에서 캐낼 거야 뭘 아느냐? 역사를 통해서 여러 가지 검증하고, 확인해 보고, 그게 과연 그런가 하여 또 여러 가지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 보는 그것이 뭉쳐서 이어지는 것이 뭐냐? 역사거든요.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진리에 가깝다는 거를 딜타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사적으로 적용시키면, 예를 들어서 루터 같은 경우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캐톨릭 측에서 기존에 교회가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루터가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천주교에서 뭐라고 했겠어요? 그 이야기 다 한거다, 한 거. 그리고 교회보다 성경이 우선이다. 그 이야기도 이미 천주교에서 한 거잖아요. 다 했다 이 말이죠. 했는데 천주교라 하는 것이 이건 누구 주장해서 천주교가 아니잖아요.
수천 천년 이상 눅눅히 검증하고 확인하고 과연 그런가 하여 그것을 판단하고 연구하고 탐색하고 석학들이 한둘이 아니고, 연이어 나오는 석학들이 또 검토해 보고 검증해 보고 그래서 거짓이다, 뭔가 불합리하다 하는 건 다 빼버리고 이것은 누가 뭐래도 옳다 하는 것만 모아 모아서 그걸 이어이어서 교회가 역사라는 걸 구축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해서 한 걸 루터, 츠빙글리, 칼빈이 나서서 뭐 새롭게 이거다 하고 나선 거, 그게 새로울 것 같으면 천주교도 할렐루야 하고 받아들이겠는데 이미 개혁주의가 한 이야기는 이미 천주교에서 이야기 여러 번 되풀이해서 써먹은 거고. 이미 했던 거다 말이죠. 했던 거지만 그렇게 주장해서, 그림으로 그려보겠어요. 상당히 재미있어요.
교회역사가 니케아회의 이후 칼케돈회의 이후 삼위일체가 정립되지요. 325년 삼위일체가 정립되고 난 뒤에 1517년까지 천년 이상 이끌어간다 말이죠. 천년 이상 이끌어 가는데 가면서 루터가 어거스틴으로 돌아가자. 어거스틴이 돌아가자 하는 것도 어거스틴이 500년경이니까 이것도 문제가 있어요. 어거스틴은 5세기니까. 어거스틴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루터의 제자, 칼빈, 루터와 같이 있던 츠빙글리, 이런 사람이 어거스틴으로 돌아가자, 바울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 교회보다 성경이 우선이다. 그래서 개신교가 등장하는데. 이렇게 등장한 이것이 초대교회에 이미 그런 것 다 해 본 거예요.
해 보고 난 뒤에 불쑥 몇몇 소수들이 등장하니까 영주들이 안 그래도 교황 말 듣기 싫은데 빌미 하나 툭 튀어나오니까 그걸 붙들고, 영주들의 종교개혁이라 하는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자기 토지로 돌아가는 거예요. 자기가 왕하고 싶은 거예요.
백설공주 나올 때 백설공주 동화에 보면 왕이 나오죠. 공주 나오고 왕자 나오는데 왕자가 뽀뽀해서 공주가 일어나잖아요. 그게 독일에서는 왕국이란 개념이 어떤 개념이냐? 영주 개념이 왕국 개념이에요. 왕들이 많아요. 작은 왕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거기서 동화가 나온다 말이죠.
이렇게 나왔을 때 그렇다면 재미있는 게 천주교가 이렇게 나와서 그 당시 교황의, 교황이라는 게 무슨 의미냐 하면, 기존에 왔던 모든 진리 체제를 대표하는 사람이에요. 교황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교황과, 직분성 교황이 있어요. 뭐 같은 교황이지만. 교황이 완전하냐, 완전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교황의 오류를 따지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대통령의 직분을 없앱니까? 아니죠.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고 스캔들이 있고 뭐 있더라도 대통령은 대통령 직을 못할 정도가 아니면 대통령직 유지되지요.
교황도 마찬가지에요. 교황이 예수님처럼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의미가. 천주교에서 말하는 교황은 예수님처럼 되는 그 의미가 아니고, 그냥 그 직분만 행하세요. 무슨 직분이냐? 교회에서 구축한 교회공회의에서 구축한 이것을 선포하고 대내적으로 한 하나님 앞에 한 교회니까 이건 에베소서 4장에 나오지요. 주도 하나이요 몸이 하나지요. 주도 하나이면 몸이 몇 개 이어야 된다? 몸이 하나잖아. 교회가 하나잖아요.
교회가 하나라면 교회의 지도자도 몇 명이어야 된다? 한 명이어야 된다 말이에요. 한 명이니까 누가 되었던 해야 돼요. 그 대표자를 교황이 추기경, 카디널에 의해서 추천해서 뽑는 거예요. 교황이 니가 오류가 있다, 스캔들이 있다. 그것 가지고 교황 직분을 따질 수는 공격 대상은 안 되는 거예요. 천주교가 그렇게 한 겁니다. 왜냐하면 교황이 없어버리면 유럽의 각 지역에 있는 각 교회의 사제들에 대한 직분 최종임명권자가 없어요. 이게 교황이 없으면.
교황이 없다는 말은 사제에 대한 임명자가 다수가 된다는 말이거든요. 교황이 단수거든요. 그죠? 단수에서 한 사람 밖에 없어요. 한 사람에서 내려오는 프랑크 왕국이라든지 각 유럽에 있는 사제들이 있어요. 시골 교회. 사제들에게 사제 임직을 할 때 결국 그 원천을 추적해 보면 하나이어야 한다 말이죠. 둘일 수가 없어. 둘 있을 때가 있었지요. 둘 있었더라도 하나로 묶으려고 애를 썼잖아요. 교황이 세 명 있었을 때도 있었다고. 권력단체에서.
사제가 하나의 권위 있는 교회 카리스고 교황에서 나왔다는 말은, 사제가 집례 하는 성례식, 세례와 성만찬이죠. 세례와 미사인데, 미사는 제사입니다. 미사가 예배가 아니고, 제사거든요. 이거는 제사를 드릴 때 주께서 함께 임재 하는 겁니다.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옛날 예수님을 기억하자. 이렇게 하는 게 미사가 아닙니다. 하나의 하늘의 주님과 사람이 만나는 주선하는 그 현장이 미사에요. 기독교는 미사를 드리지 않지만 천주교는 제사를 드린다니까. 기독교는 예배를 드리지만 그들은 제사를 드린단 말이죠. 제사라 하는 그 하이라이트는 뭐냐 하면, 살과 피를 마실 때 하이라이트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했지요. 마태복음 마지막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그 증거를 천주교는 어디서 뽑았느냐 하면, 성만찬의 반복성에서 뽑은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령 속에서 함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칼빈이고, 성례할 때 하나님의 신앙인에 있어서는 항상 온다고 본 게 루터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냥 기념이라고 상징이라고 본 것은 츠빙글리고.
오늘날 교인들이 관심 없는 이러한 성례의 관심이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성례에 관심이 많았느냐 하면, 성경책이 없어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인쇄술은 십자군 운동에서 동양에서 처음으로 들어온 거예요. 인쇄술, 화약, 나침반, 향료. 향료는 그전부터 왔지만. 이거는 4대 발명품은 중국에서 왔기 때문에 인쇄술이 발달하지 아니하면, 누가 번역해도 소용이 없어요. 성경 번역을 해도.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번역해도 소용이 없어요. 인쇄술이 발달해야 퍼지는 거예요.
발달되면 각자각자 이걸 보겠지만 그렇지 않은 민중들에게는 신부를 통해서 전달받을 수밖에 없고,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 요새 같으면 함께 있다는 말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있다. 이렇게 간단한데. 책이 없는데. 말씀의 인격화가 되려면 신부에요. 살아있는 말씀이어야 되고, 그 말씀이 되풀이 되려면 신부가 행하는 반복적으로 행하는 성례식이 행할 때 하나님이 살아있고, 그 신부는 아무나 자격되는 게 아니고, 하나 밖에 없는 교회로부터 신분을 인정받을 때 공증을 받는 신부, 사제에 의해서 된다 이 말입니다.
전 유럽이 날 때부터 유아세례 받거든요. 그러면 전 나라가 하나의 제국 전체가 뭐냐 하면, 사실 천주교 신자지요. 이런 천주교 신자에 있어서 교황의 위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완벽하게 천년 동안 구축한 구축을 언 놈이 몇 명, 루터, 칼빈이 와서 틀렸다 해도 틀렸다면 수정하면 그만이지, 그거는 교회가 아니다 이렇게 나와 버리면 이거는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라고.
오늘 할 공부가 그겁니다. 딜타이가 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역사가 없으면 진리가 없는 거예요. 누구 하나 독단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보았다, 신비롭게 체험했다. 이거는 역사가 검증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 소리라면 나도 하겠다. 나도 기도원 가서 기도하고 나도 하겠다 말이죠.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과연 그것이 과연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 열매는 무엇인가는 차후에 검증받고 또 검증하고 검증한 것에서 또 수정할 건 빼버리고 또 하고 수정하고 빼버리는 거예요.
모든 학문 자체가 그래요. 학문 자체가 제시하고 실험해 보고 하자 있는가, 검토해서 수정할 건 수정하고 다시 재시도하고 재시도한 걸 또 검증하고 이걸 정반합으로 쭉 나간다고 헤겔에서 공부했잖아요.
그런데 개신교가 여기서 나왔잖아요. 개신교가 되고 난 뒤에 천주교하고 똑같은 길을 가는 거예요. 지금. 그렇게 성경을 위주로 하지 않고 그들은 성경보다 뭘 위주로 한다? 교회를 위주로 하고, 눈에 보이는 교회, 교황 체제로 나간다고 그렇게 하고 그걸 반대하고 나섰다 말이죠.
루터가 종교개혁 95개조 할 때 비텐베르그 성당에다 교회에다 게시판에다 정문에다 바를 때 그때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안 했으면 그런 일 없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건축하니까 돈이 모자라니까 신부가 와서 초입세라 해서 신부가 처음 왔을 때 일년 치 모든 봉급은 성당 짓는데 다 바쳐라 해서 그걸 했고, 속죄표를 남발해서 다 했거든요.
그렇다면 성당 짓는 게 나쁩니까? 성당 짓는 게 나빠요? 성당 짓는 게 나쁘다면 뭐도 나빠야 되느냐 하면, 교회 짓는 것도 나빠야 돼요. 개신교회. 성당 짓는 걸 나쁘다곤 이야기 안 하지요. 성당 짓는데 돈을 각출할 때 성당하고 속죄하고 돈을 맞바꾸는 게 문제다 말이죠. 그러면 사람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고,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이게 사람인데 그러면 아무것도 주는 것도 없이 그냥 돈만 내라. 돈이 나오느냐 이 말이죠. 안 나오잖아요.
뭔가 성당 바칠 때 성당의 벽돌 하나에다 자기 이름 써넣어야 절에서 기왓장 하나에 이름 쓰듯이 교회에서 이름 하나 써줘야 돈이 나오지, 가만 돈이 안 나오잖아요. 그죠? 자진해서 알아서 바치기 바랍니다. 알아서 바치는 사람 있는데 그거는 그래서는 어느 세월에 성당 짓습니까? 안 된다 말이죠.
주식 배당하듯이 몇 주씩 감당해서 각자 통장 만들어서 무조건 자동적으로 이체하도록 교회로 이체하도록 요새 같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때 당시는 은행 컴퓨터 없어서 그렇게는 안 하고 속죄표로 한 거예요. 왜냐하면 어차피 그 당시 연옥이기 때문에 연옥에서 빠져 나와야 되니까.
제일 먼저 반대한 게 연옥이거든요. 연옥설을 누가 반대했느냐 하면, 츠빙글리가 반대했다고. 연옥을 반대한 것은 뭐냐 하면, 죽고 난 뒤에 부동산 교회 바쳐도 소용없다는 뜻이에요. 그 당시에는 전 영주가 다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십일조가 다 교회에 가는 게 아니고, 십일조 중에서 영주 손에 많이 들어가요. 왜냐하면 영주가 그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부동산은 영주가 세우고, 그 사제는 누구한테 임명받고? 교황한테 임명받고. 이게 브롱스 협약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천주교 개혁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너무 교회의 사업적으로 나갔다는 게 문제지, 신학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그들이 재산문제, 교회재산이냐, 영주재산이냐? 교회 분할 사건 때문에 독립 선언하는 의미에서 그들은 캐톨릭에서 벗어난 거예요. 교리 때문에 벗어난 게 아니고. 그렇게 벗어난 루터 교회나 영국 국교회나 칼빈 교회나 전부다 마찬가지로 제2탄 캐톨릭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천주교 그거를 다시 하는 거예요. 그대로. 다만 파가 깨진 거지요.
참, 이 교회사를 이걸 보면 기가 막힙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개신교가 루터, 칼빈의 사상이 있지만 루터, 칼빈, 칼빈도 초기 칼빈, 기독교강요 1권, 2권, 3권 가운데 1권 주장 다르고, 2권 주장 다르고, 3권 주장 달라요. 1권은 뭐냐 하면, 만인제사장설입니다. 누구 따라서? 루터의 제자니까 루터 따라서 루터보다 22년 후예니까.
그런데 3권 가면, 이거는 만인제사장을 포기합니다. 칼빈이. 만인제사장이 아니에요. 계급, 감독제도로 나가버립니다. 교회도 계급이 있다 이 말이죠. 서열이 있다 이 말이죠. 어디 맞먹으려고 그래. 평신도, 어디 맞먹으려고 해. 나가버리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루터의 사상은 사장돼버립니다. 츠빙글리 사상은 초장에 날아가 버립니다. 끝까지 남는 것은 칼빈의 사상입니다. 놀랍게도. 칼빈사상이 끝까지 남는 것은, 왜 남느냐 하면, 그것이 그 당시 새로 뜨는 중공, 상공업자들의 재산 증축에 있어서 신적으로 축복 개념과 결부되면서 돈 버는 것도 축복이다. 그러니까 돈 버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은, 돈은 벌면 벌수록 복 받은 표시가 난다는 거예요. 악착같이. 악착같이 버는 거예요.
그런데 경제를 공부해보면, 경제라 하는 것은 한정된 재화기 때문에 이쪽이 많이 벌면 저쪽에 없어지게 되어 있어요. 저쪽의 전세 값 오르면 전세 들어가려는 사람이 자기 예상보다 낮은 평수를 고를 수밖에 없습니다. 35평짜리 전세 얻기 위해서 1억 모아놨는데 일주일 후에 35평짜리 1억5천만 원이 되어 있다는 말은, 결국 돈 가만있는데 7천5백만 원으로 2천5백만 원 도둑놈한테 뺏긴 셈이에요. 그 도둑놈이 누구냐 하면, 전세 값 올린 사람들, 투기꾼들입니다. 외딴 섬에서 무인도에 사는 게 아닙니다. 서로 얽혀있는 거예요.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저쪽에서 무슨 일 일어났는가, 사정을 모르면 지갑에 돈 넣고 가만있어도 소매치기 당한 거예요.
배추 값 한 포기 2000원 했잖아요. 요새 500원 합니다. 무슨 뜻이에요? 이게. 배추는 가만있어요. 농민들도 2000원 하는 줄 알았어요. 500원 한다니까. 2000원 할 때 도둑놈 설쳐 댔습니까? 도둑놈 안 설칩니다. 도둑질 해봐야 기름값도 안 나오니까. 요새 배추 폭락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양파? 폭락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가치라는 것, 선과 악은 자기 양심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경제적 구조가 결정하는 거예요. 마르크스 주장입니다. 못 사는 것은, 잘사는 것이 축복이죠. 그럼 말을 바꿔서 못 사는 것은 뭐가 됩니까? 이거는 벌 받은 거예요.
그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벌 받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제일 벌 많이 받았고, 열두 제자 전부다 벌 받은 사람이에요. 저주받은 사람이에요. 전에 그랬잖아요. 예수님하고 함부로 같이 다니면 안 된다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하여튼 예수님하고 놀아서 잘된 인간이 없어요. 스데반 집사 보세요.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종교개혁 백날 해보세요. 소용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새로운 역사가 또 만들어지고, 그 역사를 주관하는 것은,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은 인간이 주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지난 번까지 딜타이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딜타이, 당신이 말한 진리가 뭐냐? 그거는 끝까지 가봐야 알지. 이게 딜타이에요. 끝까지 가봐야 알지만 뉘앙스는 뭐냐 하면, 그래도 과거보다 우리가 더 똑똑하다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잖아. 라는 뜻이에요.
조선시대 때에 그 과학을 연구한 사람, 공부한 것 하고 요새 애들보다 더 못해요. 정약용이 주장하는 요새 공고 애들보다 더 못해요. 그건 왜냐 하면, 지식적으로 정보의 양적으로 시간이 그만큼 흘러가게 되면 한꺼번에 축소해서 다 알아버려요. 축약해서 다 알아버려요.
그래서 옛날에는 잔소리할 때 노인네들이 말을 길게 하잖아요. 그런데 애들은 길게 하는 교장 선생님 훈시는 싫어요. 짧게 이야기, 다 알아들으니까 짧게. 결국 공부하라 이 말이죠. 한 5초 만에 하고 교실 들어가자 이 말이죠.
그래서 요즘 설교 어떻게 하느냐 하면, 교인들 다 아는 것 길게 하지 말고 교인들 모르는 것, 골라서 짧게, 짧게 이어나가야 돼요. 왜냐? 교인들도 성경책 보니까. 여기서 설교 어떻게 나오는지 다 아니까. 쓸데없이 남 아는 것 해서 시간 때워서 월급 받을 생각하지 말고. 당신들이 모르는 것만 끄집어내야 돼요. 그러면 목사들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해야 되겠어요. 같이 화투 패를 갖고 있는데 저쪽에 없는 패를 내야 돼요. 저쪽에 갖고 있는 것 내면, 없는 걸 내야 돼요.
오늘 공부해야 될 것은 가다머입니다. 가다머 하기 전에 그전에 해야 될 것은 하이데거를 공부해야 됩니다. 하이데거는 역사가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어요. 왜 반대하느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이게 변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변하는 것을 쫓아간다는 것, 그만큼 허망한 것 없어요. 그래서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쉽게 제가 이야기하겠어요.
열아홉 살 때 세상을 봅니다. 열아홉 살 때도 세상을 볼 것 아닙니까? 다 보니까 세상을 볼 때 열아홉 살 때 나름대로 세상을 보면서 거기서 무엇을 끄집어내야 되느냐 하면, 나름대로 소망을 끄집어냅니다. 흔히 말하는 비전을 끄집어내죠. 그 다음에 자기의 미래상도 끄집어냅니다. 이렇게 되고 싶다 하는 것과 그 되고 싶은 것의 결과가 미래상이거든요.
나 이렇게 되고 싶다. 열아홉 살 때 난 그냥 삼성그룹의 직원으로 하고 싶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내가 삼성그룹의 직장하게 되면 예쁜 아가씨하고 결혼해서 아파트 몇 평짜리 살고. 이게 미래상이지요. 열아홉 살 때도 소망 갖게 되고 미래상 갖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군에 갔다 왔다. 나이 스물일곱 살 됐다. 스물일곱 살 되고 난 뒤에 마찬가지로 소망을 갖게 되는데 예를 들어서 스물일곱 살 때 군에 갔다 오고 나서 진짜 엘지에 들어갔다 합시다. 딱 들어가고 난 뒤에 이 소망은 갑자기 여기 소망은 열아홉 살 때 소망과 미래상을 갖고 있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은 그러니까 하이데거가 똑똑한 게 이 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열아홉 살 때 소망과 미래상이 있고 스물일곱 살 때 나름대로 소망과 미래상이 있다. 이것까지는 사람들이 이야기했었어요. 그전에 철학자들이. 그러니까 이것이 같은 게 아니다 말이죠. 목회 1년 할 때 하고, 목회 10년하고 달라요.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데 하이데거는 뭐까지 아느냐 하면, 이것이 그러니까 1, 2, 3이라면 19세 일 때 갖고 있는 소망, 이것이 오히려 스물일곱 살 현재 나를 변화시킨다는 거예요. 이 점. 이거에요. 좀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에 드는 여자 있다. 저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다 했다 말이죠. 결혼하고 싶을 때는 저 여자하고 결혼하게 되면 밥도 잘하고 뭐도 잘하고 내가 보기에는 밥도 잘하니까 맛있는 밥 해달라고 잡채도 해달라고 해야지.
여기까지 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까 그 여자에게 아버지가 둘 있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조카까지 들여야 되고, 엄마가 도망해서 싸움 벌이고. 이거는 내가 예상 못 한거죠. 그러면 무를까요? 그러면 취소할까요? 안된다 이 말이죠.
결국은 내가 선택한 환경이 선택은 내가 해놓고 선택한 환경이 도로 나를 선택해서 나를 꼼짝 못하게 나를 변화시켜버리면, 거기서 나름대로 또 소망과 비전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 저 여자와 이혼하게 하옵소서. 또 새로운 소망이에요. 이거는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가 예상도 못한 거죠.
그러니까 지금 딜타이는 간단히 생각해요. 세월 지나면 더 새롭고 더 발전된 게 나온다. 간단하게 생각하는데, 하이데거는 인생사가 간단한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사람이 자기가 절대자 같으면 싫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세상 살면서 싫으면 그만일 수가 없는 거예요.
이혼하면 그럼 지금 난 애는 어떻게 하고? 애 없이 이혼하면 쉬워요. 나는 결혼 안 했다고 하고 거짓말하면 되는데 애가 있는데 어떻게 해. 이거는 자기가 선택한 그 여자와 선택한 그 결과에 의해서 애까지 낳은 이 애를 이건 고아원에 맡기고, 이런 비정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럴 수가 없잖아요.
내가 저지른 그것이 운명으로 나를 통치하네, 나를 지배하네? 그렇다면 그런 가운데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옳다고 선택한 그 옳음이 어디 있어요. 아무것도 옳은 게 없지요. 그 다음에 또 선택해서 그래서 이혼했다. 애 하나 두고 이혼했다. 또 어떤 여자 할 때는 그 다음엔 걱정스럽지요. 걱정스러워서 이번엔 원만한 가정하고 여자하고 결혼하겠다. 원만한 여자하고 결혼했는데 사실 그 여자가 대대로 당뇨병이 있네. 이것 또 몰랐던 사실이에요.
교회에 그런 거 많습니다. 작은 교회는 그런 게 없습니다만 큰 교회에 가면 많아요. 큰 교회 가면 교회 금방 와서 헌금 뭉텅이로 해서 사람들 한데 장부 달아놓고 나중에 장로가 아니고 사업해서 몽땅 그거. 그러면 장로 물을 수도 없고.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걸 가지고 헤겔은 뭐냐 하면, 상호기만, 상호위선이라 했지요. 참, 멋지게 이야기한 거예요.
이 사회를 한 마디로 말해서 상호기만, 상호위선. 그걸 고린도전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속고 속인다 하나님이. 속이는 놈 할 수 없어요. 속고 속인다하는 거예요. 사기꾼들의 대부분이 사기를 당했던 사람입니다. 복수 차원에서 사기를 쳐요. 아까 여기 마사지 한다 했잖아요. 사람이 마사지 세게 하는 것은 자기도 마사지 한번 세게 당해 봤기 때문에 복수 차원에서.
사람이 가만 당하고 있을 존재들이 아닙니다. 당한 만큼 되갚아 주는 게 인간이에요. 이것이 그 가운데서 진리를 찾는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진리라 하는 것은 역사 끝에 가도 모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왜? 스물여섯 살 돼 봐도 아직 사십이 안 됐으면 모르고, 육십이 되도 마찬가지에요. 육십이 되도 지나간 세월은 그거는 무효에요.
지금 오래 살았다고 연세 많은 사람보고 오래 살았으니까 그만 죽으시죠. 이거하면 욕 얻어먹습니다. 오래 살았다고 그만큼 죽고 싶은 줄 알아요? 말로만 죽고 싶다 하지만 사실은 오래 사나, 안 사나 항상 그때 스물아홉 살 때 그대로 스톱되어 있습니다. 제일 잘 나갔을 때.
그건 뭐냐? 하이데거는 진리라 하는 것은 역사에 있는 게 아니다 말이죠. 그게 하이데거의 예리한 점입니다. 진리는 역사에 있는 게 아니고, 그럼 뭐냐? 역사에서 진리를 찾는 동기, 또는 욕망에 있다 말이죠. 그게 용어에 뭐냐? 이것이 안 죽으려고 하는 것. 이게 하이데거의 진리에요. 사람이 모든 진리를 찾든, 예수를 찾든, 하나님을 찾든 모든 동기가 있는데 그 동기가 뭐냐? 안 죽고 싶다. 나는 영원히 살고 싶다는 거예요.
그걸 하이데거는 뭐라고 하느냐? 현존재. 그냥 존재라 하는 거예요. 그걸 존재라고 봐요. 하이데거는 존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존재는 죽음마저, 그 존재를 언제 느끼느냐 하면, 역사가, 열아홉 살, 스물 살 때 아무리 해도 진리를 못 찾아요.
언제 사람이 존재란 진리를, 존재가 진리인데, 아느냐 하면, 죽었다고 생각할 때 딱 지금 죽었다고 생각할 때 그 순간만 예.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비로소 살고 싶다. 그러니까 평소에 살아있을 때는 살고 싶다고 살아가는 게 아니고, 살아 있으니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죽을 때가 되면 나는 살고 싶다가 나오는데, 그 살고 싶다가 사실은 욕망으로 발생된 것이 모든 행동이고, 장사하는 것, 농사짓는 것, 교회 가는 것, 전부다 살고 싶다의 다른 형태죠.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 말씀 많이 듣고, 기적도 권세도 행하고 기적도 많이 체험해 놓고 마지막에 자기가 죽는 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저 사람에 대해서 난 모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한 게 아니고, 메시야를 부인한 게 아니고, 저 사람에 대해서는 나는 아는 바 없다. 나는 모르겠다. 진짜로 모른다. 저 사람을 저주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하나님의 성경지식이 하이데거에 의하면 자기 존재 하나 모르는 거예요. 자기 존재는 본성이기 때문에 본성은 본인이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러죠. 밀가루 덩어리에서 수제비 나오잖아요. 돌에서 수제비 안 나옵니다. 밀가루 덩어리에서 나오듯이 밀가루 덩어리가 존재라면 자아라는 것은 열아홉 살 때 자아, 스물 살 때 자아, 순간순간 느끼는 자아라는 것은 존재라는 그 밀가루 덩어리에서 나온 거예요.
그 밀가루 덩어리가 뭐냐 하면, 더 살고 싶다. 죽기 싫다. 죽음 앞에서의 그걸 가지고 실존주의 철학이라 해요. 죽음 앞에서 더 살고 싶다. 왜 나오십니까? 교인들한테 물어보면 이유 모르지만 더 깊이 이야기하면 살고 싶어서 나온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생불사. 그러니까 불멸이죠. 누가? 자아적인 존재를 불멸적인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자아를 불멸적으로 만드는 게 기독교라 하면, 앞에 자아를 없애버리고 그냥 모든 것이 불멸이라 하는 것이 무슨 종교냐 하면, 이게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없고 무아로 바뀌죠. 자아 떼어버리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게 불교잖아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고민할 것도 없지요. 왜냐하면 고민해야 될 주인공이 없으니까 자아가 없으니까. 그게 무아사상이란 말이죠. 무아사상은 불교의 초기사상이고 후기사상이에요. 중기사상인데.
그러니까 이 고민과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은 자아에서 나왔고, 이 자아라 하는 것은 자아를 인정한다면, 이 자아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이건 연세가 얼마 오래되었던 젊었던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인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진리라는 것은 뭐냐? 진리라 하는 것은 다 핑계고. 신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합니다. 그건 핑계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솔직하게. 전 삼위일체가 궁금해 죽겠습니다. 어허. 솔직하게. 어이, 솔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진작 그래야지. 죽기 싫어요. 진작 그래야지. 그래서 종교란 게 거기서 생겨난 거예요. 이방종교 거기서 생겨난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 보면 성경에 보면, 하이데거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기존의 모든 교회를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놀고 있네~. 이 말입니다. 백 날 너거들 해봐라. 너희들 수법을, 교리와 성경지식으로 완전히 도배를 하고 있지만 도배를 위장술을 한 풀 벗겨보면 살고 싶다는 내 주장이 맞잖아. 그런데 뭐가 성경이고, 뭐가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자기 살고자 하는 짓인데. 라고 조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특징이 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데 사람들은 그걸 못 알아봐요. 알아채질 못해요. 눈치가. 뭐냐 하면, 이게 원래 살아서 더 살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데 더 있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항상 죽음에 넘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매일같이 살려내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이것은 기존의 종교하고 관계,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의 주제가 뭐냐?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성경은, 인간들은 완전히 배제시켜버리고 여자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단수입니다. 마귀의 후손과의 싸움이에요. 역시 단수죠. 싸움판이라고.
싸움판인데 악마는 뭐냐 하면, 죽음가지고 인간들을 놀리고 있고, 이거는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죽기를 무서워하고 종노릇하죠. 이렇고. 여자의 후손은 나중에 실체가 드러나며 죽은 지 삼일 만에 되살아나는 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싸움은 무슨 싸움이냐 하면, 악마는 니, 그러면 죽는 데이. 이게 악마의 호소력이고. 열심히 믿어야 살아. 라는 것이 악마의 목소리고. 여자의 후손은 죽어도 괜찮아. 죽어도 괜찮다 말이야. 이것이 여자의 후손에겐 복음이고. 어느 게 더 기쁜 소식이에요? 두 분의 전쟁터에요. 한 분과 한 놈의 전쟁터라니까. 어느 게 복음입니까? 죽음 가지고 이야기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살리라.
이 말이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당시 속에 안 들어가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원래 없는 나라에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조상, 이삭을 이삭의 운명이 이스라엘 운명과 동일하게 보는 겁니다.
이삭의 운명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의 축복이 담겨진 것이고, 그 이삭에게 내려진 그 운명이 축복 형식으로 그대로 담겨진 게 이스라엘로 내려옵니다. 에서가 아니고 야곱에게 내려와요. 야곱에 담긴 운명은 야곱의 열두 지파에게 내려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열두 지파가 나오고, 십사만 사천이 나오지요. 그것은 뭐냐? 이삭과 동일한 운명으로 적용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죽는 것이 나한테 유익함이라. 주와 함께 거하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노릇한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죽기를 무서워하는 종노릇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성경 구절을 아주 도배를 하고 덤터기를 외우고 신학을 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다 해도 그런 것을 통해 살고자 하는 자는 결국 그건 도루묵이라니까. 도루묵도 요즘 비싼지 모르겠지만. 백날 해도 천당도 못 가면서 천당 간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에요. 그게.
그래서 교회에서 축복이란 말은 뭐냐 하면, 하이데거의 조롱거리대로 이렇게 하시면, 약간 더 버틸 수 있습니다. 이걸 축복이라 보는 겁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뀐 게 축복이 아니고, 아예 절망할 필요조차 없는 그게 진짜 축복이다 했지요. 왜냐하면 절망에서 희망 되 봐야 그 희망 곧 절망으로 바뀝니다.
인간의 욕심은 희망을 그냥 희망으로 가만 두질 않아요. 더, 더, 더, 더. 더더더더 음주 측정하듯이 더더더더 해서 더 요구해요. 열아홉 살 때 희망, 스물여섯 살 때 만족하지 않습니다. 스물여섯 살 때 희망, 서른 살 때 만족하지 않아요. 더더더더.
그러니까 이 하이데거가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드디어 철학의 종말 정도가 아니고, 그래서 하이데거는 나는 철학을 작살낸다. 아니 철학도 작살내버려요. 죽음만이 생생한 생까라요, 실체요 현실이지 백날 가봤자 죽는 것인데 이 죽음이 진실이고. 인간은 그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몸부림이 인생사다. 이걸로 우리 철학, 신학 끝내자 이게 하이데거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하이데거 철학을 최고로 쳐주고 공부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특히 하이데거는 칸트를 굉장히 공격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객관성이라 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주관성에 비하면 그거는 허망한 것이고 허상이고, 죽기 싫다는 것이 하나의 죽기 싫다는 방어 막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체제다. 도덕? 그거는 살고자하는 몸부림이다.
도덕, 윤리라 하는 것은 착하면 오래 살 수 있죠. 이게 착하면 오래 산다. 의로우면 오래 산다. 항상 의롭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오래 산다. 의로우니까 곧장 죽자. 이런 사람 없어요. 의로우니까 가치 있고 가치 있으니까 오래 산다.
얼마 전에 대구 지하철에 어떤 또 미친놈이 불 지르려고 할 때 영남공고 애 세 명이 달려들어 했거든요. 마침 뉴스가 나와서 우리 세 식구가 보면서 했어요. 제 아내와 제 딸이 아주 예리하게 했어요. 저 애가 그 시간에 왜 공부 안하고 농땡이 쳤느냐 말이죠. 저 공부할 시간에 저 애들 왜 탔느냐? 분명히 농땡이거든요. 그것도 고3이라. 수능 며칠 남았어요? 아예 수능도 포기하고 놀려가는 중이었다고. 그런데 걔가 덮쳐서 했거든요. 포상금 100만원 받습니다. 어른 한 사람하고
걔가 만약에 상 받았잖아요. 의로운 행동했잖아요. 수백 명 살렸잖아요. 했는데 걔가 만약에 사흘 뒤에 죽어보세요. 이거 무슨 죄를 지어서 죽었느냐? 이렇게 나온다고. 그러니까 살고 죽는 것 갖고 뭘 측정하느냐 하면, 착하면 오래 살고, 나쁜 짓하면 객사한다. 뭐 이런 공식이 있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도덕이란 게 뭐냐 하면, 오래 버티고 오래 살기 위한 자기의 하나의 의 쌓기, 자기의 의를 축적하고 쌓기에요. 그걸 그대로 세련되게 만든 것이 교회생활, 신앙생활, 성화론입니다. 그걸 아주 세련되게 만든 것이. 다듬은 것이. 그래 성화론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 납득을 해요. 참, 은혜 끝내준다. 이런 식으로. 자기 요구하는 걸 해 줬으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우리도 살릴 수 있다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없어요.
지난 주일날 아침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다운 스톱되어 잘 못 들었겠지요. 도대체 누가 예수님 위해서 우는 사람 누가 있느냐? 요새. 요새 자기 신세타령해서 울었지, 자기 신세타령해서 맨 날 교회에서 울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의지하지 않는다고 우는 사람 요즘 거의 없어요. 그건 뭐냐? 애초부터 신앙이라는 것이 자기를 위한 신앙이었지, 하나님의 성경의 뜻대로 주를 위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그것 때문에 울진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보통 철학은 끝났다. 더 이상 철학 없다 했는데 그 뒤에 누가 나오느냐? 가다머가 나왔어요. 가다머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여기 교재는 186페이지 교재인데.
역사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어떻게 진리를 찾을 수 있느냐, 진리가 어디 있느냐? 하이데거는 극단적인 주관주의. 죽음 앞에 나 자신. 주관주의로 나갔다면, 딜타이는 극단적인 역사객관주의. 알기는 누가 안다고 해. 니가 나중에 역사를 다 살아봤어. 몇 년 살았다고 알기는 뭐 알아. 세월 지나면 니 주장도 달라질 걸. 이런 식으로 딜타이는 역사객관주의.
그리고 하이데거는 역사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든 하나의 상상력이고, 실제로는 나의 죽음이 배태한 하나의 그림에 불과하다.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렇게 주관주의. 그 두 개를 결합시킨 사람이 가다머란 사람이에요.
이 가다머라는 것이 사실은 현대성경해석학의 최고봉에 있는 사람이에요. 모든 현대성경해석학은 가다머에서 다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거는 심한 말 하는 게 아니에요. 모든 성경해석은 다 가다머에서 나왔어요. 왜 가다머에서 나왔는가? 가다머 이론을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왜 현대 모든 성경해석이 가다머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다머는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1592년. 1592년 하는 것은 루터가 최초로 한 종교개혁 당시죠. 우리나라 같으면 임진왜란 당시죠. 이순신 장군. 1592년 그때 난중일기를 썼습니다. 지금은 2005년이거든요. 지금 2005년의 역사학자가 뭐가 궁금하냐 하면, 이순신이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다 이 말이죠. 그럼 여기 난중일기를 썼잖아요.
2005년 이 인간이 타임머신 타고 1592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돌아가요. 이거는 아인슈타인이 밝혀냈는데 절대로 과거로 못 돌아간다는 겁니다. 밝혀냈다 하는 게 좀 우습죠. 상식이 아니냐 하는데 현대에선 그렇게 하는데 상식도 수시로 정리해야 됩니다. 이게 가역반응이 안 돼요. 가역반응이 안 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돌아갈 수 없다고.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화이트 홀 해서 이쪽 우주로 간다는. 시간의 역전될 수 없다고 그걸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했는데.
2005년도에 있는 사람이 그 당시로 못 돌아갑니다. 못 돌아가면서 이순신이 어떤 인간이냐 어떻게 밝혀낼 것이냐? 이게 문제인 거예요. 못 돌아간 상태에서 난중일기를 가지고 해 버리면 그 당시 이순신이 아니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각색한 현대인들이 조작해 낸 이순신이죠. 이렇게 되면 진짜 이순신이 아니고, 2005년도 이순신이 따로고, 2006년도 이순신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2005년 이순신, 2006년 이순신, 어느 것이 맞습니까? 2007년도 가서 또 결과를 봐야 돼요.
이렇게 되면 이게 하나의 이순신에 대한 것 같으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괜찮은데, 이게 성경책이라면 이순신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님이라면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가 큰 문제에요. 작년 예수 다르고, 올 예수 다르면, 그러면 작년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성경에 보면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해서 옛날 예수 믿을 때 그때 해야 되는데 확정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에 1592년도 그 당시에 지평이 있다는 거예요. 지평이라 하면 지평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게 참, 용어가 어려워요. 학자들 용어가. 왜 용어가 어려우냐 하면, 기존의 용어 써가지고는 자기 뜻을 설명이 안 돼요. 사람이 기존의 용어를 쓰면 그 용어 안에 개념 안에 갇히게 돼요. 더 이상 나올 게 없어요.
더 이면에 추가된 어떤 새로운 일을 하려면 용어란 틀을 벗어나서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줘야 돼요. 성경에도 있죠. 그냥 피조물이라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새로운 피조물이라 해서 새로운 피조물은 이 피조물하고 연관성이 없어요. 새로운 피조물에서 기존의 피조물을 다시 보자는 겁니다. 이런 것이 신학에서도 성경에서 어려운 대목이죠.
예를 들어서 성령이 오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너희들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9절 나오지요. 성령께서 이렇게 하신다 하죠. 그렇다면 얼마나 어려운가 보세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 심판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판한다 이 말은, 심판에 대해서 심판한다면 이 심판 개념과 이 심판 개념이 달라요. 죄에 대해서 책망한다, 죄에 대해서 심판한다는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죄가, 우리 평소의 죄가 자기 죄를 심판하죠. 내가 알고 있는 죄의 개념으로 나를 정죄하는 그것을 성령께서는 정죄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간음했습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하면 뒤통수를 패버리는 기라. 간음했으니까 나쁘다 하는 것은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이에요. 간음했으니까 나쁘면, 그 반대는 뭡니까? 간음 안 했으면 의롭죠. 그 의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다시 와 버리면 우리가 죄라고 여겼다는 그것이 죄인 줄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뭔 뜻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만 죄와 의에 대해서 알고, 우리는 모릅니다. 해야 돼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예수님 십자가 못 박혀서 내가 가슴이 아픕니다. 아프기는. 니가 아플 처지나 되나. 그러면 십자가 보고 회개하면 니는 착한 놈 되네? 착하죠. 그러니까 맞아야 되지요.
이게 오늘날 교회 문제가 되죠. 성도 되고 난 뒤에 거듭나고 된 뒤에 의로운 행동이 있다는 거예요. 의로운 행동이 뭐냐 하면, 설교하는 것도 의롭다는 거예요. 의인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지, 자기가 설교하는 착한 행동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예수님 화목제물로 종결된 상황인데, 하나님 화목제물로 종결된 상황을 가지고 그걸 우리가 추가해서 보태서 어떤 행동으로 새삼스럽게 영광 돌리는 거 없어요. 예수 믿으면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에요.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영광 받았다. 빌립보서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개념들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이 개념이 뭐냐 하면, 이 개념이 어렵기 때문에 가다머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평이라 합니다. 지평하고 약간 유사한 개념이 뭐냐 하면, 경계선이에요. 경계선은 뭐냐 하면, 철조망 쳐놓으면 가보면 철조망 있어요. 있잖아요. 이건 경계선이에요. 지평은 내가 10미터 접근하면 지평선은 10미터 물러가 있어요. 끝이 안 보여.
좀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구가 둥글지요. 조그마한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시선이 보니까 산이 이렇게 보이고 산이 쭉 있는데 저 뒤에서는 안 보여. 왜냐하면 시선이 빛은 직진하기 때문에 이것밖에 안 보이거든요. 이것이 세상의 끝인 줄 알았어요. 애들이 골목 끝이 세상 끝인 줄 알잖아요. 애들이 골목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줄 알잖아요. 일곱 살 때, 대여섯 살 때. 요새 일곱 살 애들은 귀신입니다만. 옛날 일곱 살 때는. 그래서 나중에 열 살 때 쯤 되면, 스물 살 되면 자고 오고 그러지요. 세상 넓다 이 말이죠. 그래서 스물 되면 배낭여행 유럽 가잖아요. 더 넓게 보려고. 그게 지평이에요. 이제 지평 이해됩니까?
지평은 이쪽은 관계없어요. 이쪽은 그냥 가만있어요. 죽은 이순신은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는데 자기가 보는 관점이 좁아서 짧게 보면 요만큼 보이지요. 그런데 점점 넓게 보면 이것까지 보이지요.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에 대한 그 넓이라 하는 것은 현재 2005년도에 우리가 어떤 지평선으로 다가 오느냐에 대해서 교차지점에서 여기서 안 만큼 의미가 생기고 진리가 발생된다 이거에요.
딜타이는 이걸 이야기하지 않고, 역사는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점점 더 쌓이고 쌓여서 점점 더 진리답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돼버리면 현대인들은 몽땅 과거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돼요. 그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과학에서는 그게 통할 줄 모르지만 이 세상은 과학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인생의 의미라든지 양심이라든지, 세상을 보는 관점, 행복이라든지. 행복이 옛날이 행복합니까, 지금이 행복합니까? 이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저 북한 나라가 행복합니까, 우리나라가 행복합니까? 이건 질문이 성립이 안 돼요. 누가 국민소득이 높습니까? 그거는 성립이 돼요. 그러나 행복이라든지, 북한 사람이 잘 웃습니까, 우리가 잘 웃습니까? 이거는 말이 안 돼요. 그거는 DNA 유전자에서 내림이 잘 웃는 집안이 있고, 안 웃는 집안이 있어요. 이거는 나라와 국적과 상관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이 신앙이 좋습니까, 요새 사람이 신앙이 좋습니까? 맨 날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런 걸 물어요. 신앙이 무슨 역사와 관계되어 있습니까? 옛날 사람이 지식을 많이 요새 사람이 지식이 많습니까? 그거야 지식은 다르죠. 하지만 과학적인 것 말고. 행복은 과학이 아닙니다. 행복은 진리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저쪽 지평과 이쪽 지평이 넓히면 교차지점에서 의미가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미래로가 아니라 진리가 과거에서도 진리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나오죠. 그렇게 되면 이 성경책 갖다 버리자가 아니라 그 당시 갖다 버리지 나왔으니까. 왜냐하면 그 당시 진화론 나왔지요. 다윈 나왔지요. 마르크스 나왔지요. 이제는 유럽 사람들 교회 안 갔습니다. 성경은 옛날 신화라 신화. 옛날 동화집, 백설공주 동화책이라. 이걸 현대인들 똑똑한 사람이 왜 믿느냐 이 말이죠. 착한 일은 그 당시 시민단체에서 해버리고 그래요. 착한 일은 교회에서 하는 게 아니고 시민단체에서 다 하는 거예요. 더 이상 교회 갈 필요 없어요.
그것을 구세주처럼 등장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가다머가 등장해요. 옛날의 진리는 현재 당신이 인간 됨됨이에 따라서 더욱 더 많이 획득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이게 가다머에요. 누가 가다머를 좋아하느냐 하면, 김용옥 교수 좋아합니다. 왜? 김용옥 교수가 전공이 뭡니까? 노자, 공자. 옛날 고전 전공이잖아요. 그러니까 가다머가 이순신 장군한테 배울 게 있고 다 있는데 그전까지는 뭐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 공자 갖은 것 이제 버리자 인데 이건 결국 무슨 소리냐 하면, 성경 갖다 버리자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현대인들은 새로운 걸 배워야지, 그 우리보다 뒤떨어진 걸 왜 배우냐 하는 거예요. 뒤떨어진 게 아니고, 진리라 하는 것은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와 현재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와 현재의 교차한 지점에서 만난다. 이게 가다머입니다.
따라서 이 가다머의 해석을 가지고 성경에 적용시키면, 그 성경에 적용시킨 해석들이 그 뒤에 나오는데 그게 바로 폴 틸리히입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철학을 그대로 신학에 적용한 사람이 불트만. 그 뒤에 나오는 칼 바르트도 본 회퍼의 영향 입어서 본 회퍼는 이쪽이죠.
가다머란 사람이 진리라 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놀라운 그것을 체계적으로 이렇게 그것도 지평이란 것. 어딘데, 어딘데, 어딘데가 아니고, 현재 너가 인품이 높아짐에 따라서 과거는 무용지물이 아니고, 과거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품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오히려 과거에서 더 많은 진리와 의미를 인생의 참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고전의 인문주의 하는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은 겁니다. 특히 가다머 오래 살았잖아요. 복 받은 거예요. 그야말로 교회를 살리는 이 과학시대에 성경의 가치를 다시 높인 사람이 가다머라. 자기는 성경하고 관계없었는데 하도 신학자들이 ( )
그래서 가다머는 이러한 만남을 뭐라고 보느냐? 이걸 하이데거를 따라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이데거도 그런 주장했습니다만.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쓰겠습니다. 이걸 가지고 바로 '사건'이에요. 이 사건에 대해서 하나의 사건이 점으로 이 지상에 나타난다고 주장한 사람이 불트만.
그리고 이 사건이 계시를 만든다고 한 사람이 에벨링이라는 신학자. 하나님은 사건이에요. 말씀의 사건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깨우치게 한다는 거죠. 이런 신학들이 뒤에 나옵니다. 여기 에벨링 나오죠. 에벨링이 185페이지도 나오고 뒤에 나옵니다만.
[해석의 중심 문제가 말씀사건에 동반하는 이해론에 있다.]
185페이지 밑에서 일곱째 줄에.
그 사건이 언어로 구축되고 그 언어를 해석하면 그 언어 속에서 과거의 언어와 현재 자기의 지평이, 언어 속에 지평이 있으니까 과거의 언어 속의 자기 과거의 지평과 현재 언어를 해석하고 있는 현재의 지평이 서로 만나는 가운데서 거기서 의미가 발견된다. 진리가 발견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186페이지 중간에 보면,
[역사는 우리를 포용하고 있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주의로 끝나야 하는가? 서로 경쟁적인 해석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의 실제는 전통이며 언어이다. 이 공동의 차원을 근거로 우리는 '지평들의 융합'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게 가다머가 주장하는 거예요. 지평들의 융합이다. 전통과 언어죠. 이 전통과 언어가 그 만큼 중요하다 하니까 갑자가 누구 생각나느냐 하면, 역시 또 천주교가 등장하죠. 그럼 개신교도 뭐 됐다 했습니까? 개신교도 천주교화 되고 말았죠. 왜냐하면, 역사를 주장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역사를 개신교의 대표적인 교파가 뭐냐? 청교도거든요. 1648년, 유명한 베스트팔렌 사건으로 해서 유럽의 영토가 분할되는 회담이 있었지만. 그 사건 말고 1648년은 1618년부터 있었던 웨스터민스터, 영국에서 회의가 있었죠. 거기서 나온 신조가 뭡니까? 웨스터민스터 신조 아닙니까? 크롬웰이라든지 리챠드 백스터 하는 이러한 유명한 청교도 있거든요.
이 1618년에서 1648년의 웨스터민스터 신조가 놀랍게도 이게 그 당시 17세기거든요. 근데 20세기의 미국장로교회에까지 이게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미국장로교회가 그대로 들어온 것이 한국의 장로교회고. 여기서 보면 우리가 여기서 뭐가 이상하냐 하면, 어떻게 과거의 산물을 지금 21세기까지 아직까지 써 먹느냐 이 말이죠. 그동안 뭐 했느냐 말이죠. 그게 참,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옛날 20년 전 옷 입어 보세요. 입고 돌아다니면 욕합니다. 아무리 알뜰살뜰 하다해도 욕합니다. 이미 20년 전에 유행지난 옷 입고 가면 욕합니다. 그런데 옷은 욕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욕하지 않느냐 말이죠. 이것은 과거의 권위에 빌붙어서 현재 자기의 정당함을 추구하겠다는 얄팍한 사업상의 논리였습니다. 과거의 유력한 어떤 권위자나 영웅적인 사건으로 해서 해버리면 아까 의미는 어디서 생긴다? 에벨링은 어디서 생깁니까? 사건이죠. 보세요. 현재의 사건의 의미는 없잖아요.
어떤 새로운 사건 들어가면 쪼르륵 도로 어디로 가느냐 하면, 과거 1648년도 가는 기라. 이거 맞습니까? 이렇게 한다고.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죠. 하나님은 언제 적 하나님이냐 하면, 1648년도 하나님입니다. 천주교는 더 심합니다. 천주교는 325년도 하나님입니다. 왜? 니케아회의 있었거든요. 삼위일체 하나님, 그때 칼케돈 신조, 거기까지 갑니다.
지금의 하나님은 없어. 그게 되풀이, 계속 써먹는 겁니다. 무책임하고 아무 거기에 어떤 절대적인 권위에 안일하게 빌붙으면 천당 그냥 보내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교회역사를 믿는 거예요. 교단역사, 기독교역사를 믿는 거예요. 현재 자기 삶 속에 살아있는 역사를 믿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설교할 때 제가 제일 귀에 거슬리는 것은 뭐냐 하면, 누구 칼 라일이 어떠니, 어떤 신학자가 이런 경험을 했다니 이런 걸 가지고 자꾸 설교에 집어넣는데, 목사, 당신이 어제 토요일 날 무슨 경험했어요? 예수님과 함께. 그 이야기를 교인들한테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유명한 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권위 있게 보이는 칼빈이 어떻고 루터가 어떻고. 자꾸 한물간 옛날 과거 죽은 송장 들먹여서 또 칼빈 같으면 칼빈은 이렇게 다윗 같이 성경적으로 아브라함 같으면 내 말을 안 해요. 이미 성경은 종결되었거든요.
왜 과거, 본인이 하루하루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떠냐를 교인들에게 내놔야 되는데. 자꾸 학적으로 문제를 안 당하면 나는 정당하다 그걸로 그만 설교자로써 월급 받고 시간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강의는 과거 것 해도 괜찮아요. 강의는 원래. 그러나 설교는 어려워요. 강의보다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이 나와야 되기 때문에. 그것도 진솔하게 나와야 되기 때문에.
전에 제가 했죠? 예수님 위해서 울어 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 울어 봤다 했어요. 평소에 자주 운다 했어요. 왜? 파 다듬다가. 양파 다듬다 얼마나 매운지 울음이 나와요. 그게 내 삶이에요. 거의 울질 않지요.
그러니까 현재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이런 개신교와 청교도주의가 이렇게 과거 회고적으로 과거 지향적으로 과거의 권위에 의존하는 쪽으로 나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역사 대 역사로 한바탕 붙어보자는 거예요. 현재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 하는 게 아니고, 과거 이런 훌륭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 단체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죠.
이거는 결국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말하면 죽기 싫다는 거죠. 우리 집단은 죽기 싫다는 겁니다. 우리 교단을 찌그러들기 싫다는 거예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은 찌그러들기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대한예수교 합동 측을 믿는 거예요.
이거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가 몇 년 되었는데 우리 교회 욕하지 마라. 역사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예배당 어느 장로가 기도해서 지었고, 이 땅은 어느 권사 응답받아서 바쳤고, 이런 걸 자꾸 믿는 거예요. 지금 어제 저녁에 당신은 무슨 응답 받았나 그 이야기 안 하고, 이런 것 업적 될만한 것, 돈 될만한 것, 자본주의 돈 될만한 것, 그걸 하나의 간증거리 삼아 하는 거예요.
거기에 나온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사소한 예수님이 아니고, 작은 예수님이 아니라 위대한 예수, 영웅주의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는 가짜지요. 그건 바로 열아홉 살 때 환상이죠. 지금 육십 오세가 된 육십 오세의 예수가 없는 거예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개혁주의에서 그걸 비판한답시고 나온 게 뭐냐?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된다.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그 구호가 개혁주의가 바로 과거의 권위에 천착하고 거기에 매달리니까 그게 바로 딴 게 천주교가 아니고, 역사와 전통과 관습에다가 어떤 계시적인 진리적인 의미를 추가한 그것이 바로 천주교거든요.
조용기 목사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완전히 순복음교회가 천주교 됐잖아요. 처음부터 불교지만. 원래 교회가 아니고, 불교거든요. 불교 주지 스님 하나. 교인들 투표해서 99.9% 돼서 나이 많아도 나가지 말라 해요. 조용기 기대서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예수가 없고, 조용기 예수에 대해서 빌붙어서 덩달아 같이 붙어가자는 겁니다.
예수의 피를 먹는 게 아니고, 조용기 피를 먹는 셈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조용기와 함께 붙어 있으면 그 조용기의 순복음교회에 있는 이상 자기의 죄가 안 드러나는데 예수의 피를 우리가 날마다 먹게 되면 날마다 우리의 죄가 드러납니다. 바로 자기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 왜? 의롭게 돼야 오래 사는 게 정당화 되니까. 아까 하이데거 말대로.
가다머는 여기 187페이지에 보면, 가다머의 해석과 비트겐쉬타인. 이 비트겐쉬타인, 이 사람의 이론은 현대 들뢰즈의 언어학이론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 사람 주장은 뭐냐 하면, 의미라는 것은 쓰임새에 따라서 그때그때 의미가 주어진다.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지, 그걸 하나의 게임이라 합니다. 언어는 하나의 게임에 불과하다. 그걸 화용법이라 하는데.
그러니까 이 비트겐쉬타인의 주장에 의해서 들뢰즈가 주장하기를 모든 언어는 다 명령적이다.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인지, 모든 언어가 명령적이죠.
그런데 신학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명령법 따로 있고, 서술법 따로 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거는 서술법이고 니가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기도하라. 이거는 명령이니까 이건 해야 된다는 거예요. 서술은 인간의 존재를 만들고, 명령은 존재에서 나온 행동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옛날 구닥다리 철학에 불과한 거예요.
전부 여기 있는 모든 명령은 모든 서술은 그게 서술이든 의무든 모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