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9:42-43 /명하신 대로
명하신 대로
2006년 3월 26일 설교 본문: 출애굽기 39:42-43
(출 39:4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출 39:43)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아시지요. 그런데 창세기 1장을 세밀하게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무턱대고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질서와 구획을 정해놓으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날 때에는 빛을 만드시고, 둘째날에는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시고, 셋째날에는 물이 빠진 곳을 땅이라고 칭하시고 물이 고인 곳을 바다라 칭하셨습니다.
넷째날에는 비어있는 하늘의 궁창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고, 태양이 비추는 시간대를 낮이고 하고, 태양이 하늘에서 사라지는 시간대를 밤이라고 하십니다. 다섯째 날에는, 비어있는 궁창과 바다를 채우기 위해 새와 물고기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은, 현재 지상에서 보이는 모든 나머지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문제는 이런 창조물을 어떤 취지에서 만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창조의 완성을 말하는 날을 또 따로 만드셨습니다. 그 날은 거룩한 날입니다. 일체 피조물들은 노동을 금하고 자신이 만들어진 취지를 확인하는 날을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해서 표현해야 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피조물들은 자신의 근본 취지인 거룩을 상실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거룩이 빠진 피조물들을 더 이상 의미있는 피조물로 간주해 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피조물의 대표자 격인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탄식하고 있다고 로마서 8:22에 나옵니다.
이들 피조물이 탄식하면서 한가닥 희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로마서 8:19-23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피조물이 썩어지고 있는 와중에서도 왜 이런 희망을 갖게 하십니까? 그것은 비록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범죄하고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결코 포기하거나 취소하신 적이 없이 진행시키고 마십니다. 단지 항상 ‘거룩’을 그 안에 집어넣으시면서 일을 진행시키십니다. 그 잠입되어 있는 거룩이란 인간의 죄를 이긴 경력과 능력을 지닌 거룩입니다. 이처럼 거룩없이 피조물을 다루지 않으시는 이유는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거룩을 겨냥해서 그 피조물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일시에 다 거부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아예 하나님의 존재나 창세기 1장조차 거부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즉 비록 인간이 누군가에 의해서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왕 이렇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진 이상,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다고 나서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결별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멋대로입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도 늘 제멋대로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창세기 8:20-22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비록 인간의 태어날 때부터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 남기기’를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언약’이라는 이름 하에 실시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기 전의 성경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사람들로부터 성막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헌물받고 그 다음으로 성막 자체를 건립하고, 그 다음으로 성막에 들어가는 기구들을 제작하고 그 다음으로 성막 뜰의 기구들을 제작하고 그 다음으로 제사장의 의복을 제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런 것들을 왜 만드는 겁니까? 그것은 이 지상에서 거룩을 생산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거룩의 취지에 부합되게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증거가 곧 성막의 존재입니다. 이 거룩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뜻을 접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거룩이라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지가 엘리야 시절에도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어떤 과부는 너무나도 가난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다 소비해서 최후를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온 나라에 가뭄이 극심했는데 평소에 도움받을 곳이 없는 과부 입장에서는 이 가뭄이 더욱더 혹독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선지자가 그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과부의 다급한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공궤하라고 요청합니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선지자가 먹을 떡을 만드는데 다 쏟아넣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없습니다. 즉 과부의 입장은 더 이상 생명이 부지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강탈당한 셈이 됩니다. 마치 창조가 있기 전의 무(없음)로 되돌아가 느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떡은 먹은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비를 내리는 날까지 너의 밀가루통과 기름통에 밀과 기름이 없어지지 않고 채워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 과부의 가족의 입장에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자신을 살린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로 인하여 자신이 산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관계가 수립된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효과는, 사람이 사람을 알아서 관리하는 것과 다른 차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거룩이 없기에 ‘거룩’에 관한 것은 천리만리 도망치기에 급급합니다. 즉 그 과부의 밀가루통에 밀가루가 떨어지게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약속이 그 능력을 채우게 하십니다. 이제 그 과부는 전에 했던대로 자기 식으로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가를 점검하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된 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밑둥치에 무슨 은혜가 놓여있으며 그것이 왜 거룩한지를 살펴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