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5:20-22/하나님이 명하신 것
하나님이 명하신 것
2006년 3월 12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5:20-22
(출 35:20)『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출 35:21)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출 35:22)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막을 짓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내놓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곧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곧 너희를 위한 일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헌물을 받으시는 겁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가 누구에게 임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시편 69:24-28에 보면,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성경 말씀인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라는 배경 하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시고 분노하시는 경우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복음의 일에 훼방하든지 방해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저주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복음의 일에 훼방하는 죄가 됩니까?
그것은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사랑’으로 하지 않을 때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이라고 했을 때 단번에 오는 느낌은 ‘부드러움’입니다. 자발적이고 자원적입니다. 사랑이란 주체와 객체가 허물어져 하나가 될 때만 느끼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면 만약에 어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때에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정은 부드러움입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부드러움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자원적이고 자발적입니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말은 두 존재가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의 일이 나의 일이고, 나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요, 주님의 것이 나의 것이요, 나의 것이 주님의 것이다’고 인식이 될 때 주체, 객체 경계가 허물어진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과 반대의 상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록 하나님에게 헌금을 하고 교회 봉사는 하더라도 강력하게 자기의 주체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져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즉 “내가 내 것 가지고 헌금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현금을 하기 전에는 주체적인 나의 돈이었지만 돈이 자기에게서 빠져 나가고 난 뒤에는 객체인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라는 의식 말입니다.
이렇게되면 헌금을 하기 전이나 후에는 하나님과 통일되고 통합되기를 원하는 사랑의 마음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50:8-12에 보면,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헌금을 얼마나 했느냐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따로 챙기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문제 삼겠다는 겁니다. 소가 되었든 염소가 되었든 사람이 얼마나 많는 재산을 가졌던 그런 것을 가지고 따로 구축해서 ‘나의 것’이라고 확정 지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헌물을 해봤자, 하나님은 그 행위를 자원이나 자발적이나 부드러운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고 판정하시는 겁니다.
여전히 주체가 강력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이 신 앞에서 죄인이며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자인한다 할지라도, “그래 나 죄인이다. 어쩔래. 원래부터 못난 존재인 내가 내 마음대로 어떻게 살던지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식이 되면 그 사람은 비록 신을 하늘까지 높이고 높여도 여전히 자기 자신은 더욱더 딴딴해져 있기에 건들리면 성질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부드럽지를 못합니다.
사랑이란 참으로 부드러움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남과 자기를 주체- 객체로 날카롭게 비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처럼 주체- 객체로 비교하지 않는 자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어린 아이’가 그러합니다. 거리에는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를 가지고 논쟁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내세우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가 같이 하늘 나라를 받들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입니다.
즉 복음의 훼방하고 방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주체를 강력하게 만들면서 하나님과 통일하고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랑이 없고 그저 예의 범절로만 무장되어 있기에 부드러움보다는 껄끄러움이 더 강합니다. 헌금을 하고서도 자신이 자기의 돈을 제공했다고 행세할 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헌물을 요청한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하나님과 임대차 계약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즉 그들은 땅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품꾼들입니다. 약속의 땅은 결코 자기 소유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 하나님 땅을 경작하므로서 생존이 부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지 배가 고프고, 돈이 궁해서 그들에게 헌물이나 헌금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그 헌물을 한데 모아서 뭔가 정기적인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그 작업이란 다름아닌 제사 행위의 반복입니다. 즉 약속의 땅에서의 축복은 인간의 노동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정기적인 제사가 그 땅에서 복을 받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랑의 행위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지식과 멋진 설교를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무엇을 하든지 간데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만의 것’. ‘나의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발적이고 부드럽게 사랑으로 하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복음에 대한 훼방죄가 됩니다. 더 이상 우리의 것이라고는 따로 없습니다. 집에 있으나 집 밖에 있으나 주님의 것이 곧 우리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벌써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음을 사랑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