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4:10-12/땅과의 언약
땅과의 언약
2006년 2월 5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4:10-12
3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 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34:11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34:12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
언약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시될 때는, 확정된 뜻이 하나님에게 이미 확립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곧 ‘확정’과 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정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상당히 낯설어 합니다. 마음에 와 닫지를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확정되었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확정되었다는 것을 마냥 좋다고 하지 않을 것이 인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속에 놓여있는 인간들로서는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소망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 뿐만아니라 예상치도 않았는대로 불구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확정적이지 말고 인간이 원하는대로 신께서 그 때 그 때마다 응답해주는 것이 인간쪽에는 편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확정적이라는 뜻은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는 뜻에서 확정적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자진해서 신을 찾고 있는 형편이기에 하나님께서 구태여 우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일깨어주고, 또한 자기 자신에 무지할 뿐만아니라 언약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언약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확정지은 것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 주변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많이 배치시켜 놓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하나님을 아는 자들 사이에 삶에 있어서 전혀 차이나는 것이 없음’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믿고 살면 모든 면에 있어 세상과 현저한 차이가 나리라 여겨지만 이상스럽게도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 할수록 세상과 닮은 점이 더 심화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럴 사하게 도용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능히 자기 수완으로 지킬 수 있다고 장담했기에 그로 인하여 자기 손에서 많이 안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변에 불신자들을 깔리게 하시고 그들과 사업을 한다든지 생활을 같이 하게 되면 불신자와 자기 사이에 공통점이 날이 갈수록 많이진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교회 제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민주주의 제도’는 신이 내린 완벽한 정치제도이기에 교회 안에서도 당연히 도입해야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민주주의 제도 이전에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일을 신이 배분시켰다고 여겼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기에 여성들은 바로 예수님에게 통할 수 없고 남편을 통해서 신의 뜻을 받아야 한다고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신이 정해놓은 질서를 인간들이 파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근대 시대에 들어와서는 여자이든 남자이든 누구나 마음 속에는 신이 직접 넣어주신 신적인 요소가 있기에 개개인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옛날에는 차이가 곧 차별로 고정되어야 된다는 것이 신의 질서라면 근대 민주주의 제도란 차이를 인정해주되 그 차이로 인하여 차별을 두지 않으려는 정치안입니다. 모두가 주인이 되고 종이 되지 아니하면 사람 위에 다른 인간이 올라타는 식은 용납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형태의 정치제도처럼 여겨지고 마치 루터가 이야기한 ‘만인제사장설’에도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인간에게 사적 욕망이라는 것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욕망의 불꽃은 꺼지게 되고 공동체의 성화불만 쳐다보면서 살기를 고대해야 합니다. 물론 의식주가 충족되면 잠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란 타인으로 인해 발생되는 겁니다. 남이 가진 것이 현재 자신의 가진 것보다 항상 더 멋있어 보입니다.
상대방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축복으로 보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항상 미흡함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정복과 정복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시기와 질투와 자존심으로 인간 세계는 늘 풍랑이 자자지지를 않는 법입니다. 이것이 이방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이방나라의 정치 제도에 대해서 교회에서 쉽게 수긍이 간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언약에 대해서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언약이 어떻게 출현됩니까? 그것은 바로 그 이방민족과 일치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 의해서 도리어 하나님의 배척받는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도입되고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 언약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들의 관점과 안목으로서는 이방 민족과 결별하기는 커녕 당연히 그들의 수법을 그대로 베끼기에 급급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자신들에게 납득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야곱의 경우와 같습니다. 야곱은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내 원하는대로 다 들어주시는 분이다”라는 오해말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언약의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하나님으로서 함께 하고야 말리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축복의 당사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막대한 부와 가족을 이룰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얍복강가에서의 싸움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상대로 싸워야했고, 하나님은 사정없이 야곱을 공격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다른 축복관이 수립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곡식이 창고에 그득하다 할지라도 오늘밤에 내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사는 야곱으로 하여금 다른 축복에 눈 뜨게 했습니다. 즉 죽어도 다시 살게 된 현실이 축복이며 바로 이 축복을 받은 자로 확정된 자가 야곱이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야곱과 그 자손들은 주변 민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고 너희들도 우리의 하나님을 알면 구원된다”고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곧 언약의 증거물입니다. “나 같은 인간도 언약에 의해서 구원되더라. 너무 감격스럽게도 말이야”라고 증거할 수 있어야 그래야 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자신의 못남을 등장시켜 언약을 알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