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3:17-20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
2006년 1월 22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3:17-20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33: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본문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과연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일소시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아무리 후대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인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우겨도 모세가 그 현장에 있다면 버럭 화를 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직접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서울 안 가본 자가 감히 서울 가본 사람을 거짓말이라고 말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의 존재만으로 과연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존재만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통해서부터 행위가 나옵니다. 그 행위가 바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준다”는 식으로 행위하신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존재성만 확인하고 다시 우리 자신들의 일상으로 도망치듯이, 회피하듯이 가버려도, 하나님은 우리 뒤를 향하여 새총을 계속 쏘고 계시는 겁니다. 그 새총의 총알이 바로, ‘은혜’요, ‘긍휼’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겨줌’입니다. 즉 비록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도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향한 은혜와 용서와 불쌍히 여기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위 인물들 가운데 소위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보세요. 즉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참 하나님으로부터 새총을 받은 자라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유별난 점도 없음에도 불과하고 순전히 하나님 자의적인 뜻에 의해서만 선택되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철저한 차별성이 나타나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사에는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나옵니다. 그들도 한결같이 신을 믿노라고 우깁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시하는 신은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차별적 구원성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인간 속에 자신의 품성을 심어놓았다. 그 심성이 바로 ‘사랑’ 과 ‘정의로움’ 과 ‘거룩함’이다. 비록 인간들이 죄로 인해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회개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인간 안에는 신이 허락하신 품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랑이 바로 신의 사랑과 연결되기에 그 사람은 신이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본문과 전혀 다른 신에 불과합니다. 파스칼을 말했습니다. “참 하나님은 철학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비록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언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뽑아 세우신 자들입니다.
그들이 다른 인간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와 긍휼이 덧입혀져서 언약의 사람, 축복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은혜와 긍휼이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는 어떠한 형식으로 나타난 것일까요? 요한일서 5:12에 보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 누가 아들을 만들어서 생명을 자기에게 있게 할 재주가 있단 말입니까! 당연히 없지요. 그러니까 아들이 있는 경우에만 생명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아들이 있게 할 능력은 우리 인간의 능력 밖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과 전도란 결국,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라’라는 식으로 능력을 배양하라는 과정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의 말을 알아듣는 참 백성이냐’를 선별하는 과정이 됩니다.
그 내막이 요한 일서 4:4-6에 보면 나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즉 예수님이 곧 생명이지 다른 것으로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듣는 자만이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속한 자이기에 필히 나타나는 현상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원래부터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라면 예수님의 생명되심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이 무슨 취지로 중요한 말인지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외면할 수 밖에 없는 현상도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처럼 신약 성경 전체가 은혜 받을 자가 그리고 결코 은혜가 받지 못할 것을 차별하고 구별하는 작업으로 진행됩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시기에서, 어떤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는데, 그 때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를 가진 찬송이 펴져나옵니다.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가사입니다.
여기서 ‘기뻐 하심’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엽게 보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기쁨을 덧입은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마태복음 1:21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기능적인 내용은, 오로지 ‘자기 백성만 구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이 아니라 오직 ‘자기 백성’만 건지시는 ‘자기 백성의 메시야’로서만 예수님은 이곳에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차별화된 특혜라고 이해하는 자만이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갈 자들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대상임을 아울러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 덧붙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는 보이는 실적 형태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을 눈에 보이는 업적과 성과물로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을 갖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다는 인식은 성령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에게에만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성도는 또한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두려움까지 물리치니까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지금 당장 우리를 죽여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