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7-10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질
2005년 12월 11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2:7-10
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 목숨 빼놓고서 나머지는 다 줄테니 그 대신 목숨만은 영원히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그 목숨마저 뺏아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름대로 복안이 있습니다. 처음 창조하신 인간처럼 그런 인간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동거동락 할 의사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 마음에 쏙 드는 합당한 인간이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예수님과 우리 자신들을 철저하게 비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어느 인간도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되어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없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비와 용서를 요청하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진멸과 멸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그 어떤 의사도 거절하고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인가 하는 차원에서만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현재 인간들은 우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은 일체 인정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요청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들을 몰아세우십니다. 무엇이 참 인간인지는 예수님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그 예가 바로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만약 인간들이 그대로 지키지 아니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와르르 무너진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인간들이 약하고 범죄한 상태라는 이유로서 철회할 의사가 없습니다. 법은 법대로 끝까지 몰아붙일 참입니다. 산상설교의 내용들은 인간들로서 도저히 성사 불가능한 말씀들입니다. 그 산상설교를 통해서 인간들은 스스로 구원의지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산상설교를 끝내시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누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문둥병 환자입니다. 물론 그 사람도 산상설교에 준해서 보면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졸지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토록 무서운 심판의 말씀 앞에서 구원이 되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 사람이 산상설교를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요소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율법에 합당한 제물을 제사장에게 드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온 능력임을 말씀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는 분이라서 그 율법 완수에서 나오는 사랑과 자비가 그 문둥병 환자를 낫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을 근거로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면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취지가 붙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죄악성이 밖으로 튀어나올 때면 반드시 ‘자기를 위한 우상 만들기’ 양상으로 튀어나오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자기를 윈한 신’이란 곧 그 인간을 이미 절대화 시켜놓고서 그 다음으로 진행되는 ‘신 믿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신마저도 ‘인간의 절대화’를 위한 잠식시켜 버리는 행위를 버리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영혼이 영원하기를 원하는 본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영혼의 영원함을 위하여 신과 거래를 털 요량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절대화 되면 자연적으로 신은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마다 각자 자신의 신을 만들게 되면 사람들이 신들이 다 다르게 됩니다. 목사가 믿는 신과 장로가 믿는 신과 집사가 믿는 신이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인생 여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경험과 느낌에 따라 그 때 그 때 자기를 절대화 하면서 구상한 신들을 생각해 놓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살아온 경륜과 연륜과 경험이 상호 다르다면 그 두 사람 사이의 신도 각기 다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1 달에 한 번이라도 예배에 빠지만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시더라”라고 여기는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은 “나는 4달이나 예배에 빠져야 겨우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시더라”라고 나온다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 옳은 하나님입니까? 아마 둘 다 엉터리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목사가 믿는 하나님을 참 하나님이라고 표준으로 등장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반 평교인들의 하나님은 그 교회 목사가 믿는 하나님으로 변신해야 될 필요가 생기고 맙니다. 그렇다면 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런 차별을 일소에 붙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하나님도 십자가 앞에서 와르르 다 무너져 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하나님마저 무너져야 하고 이렇게 되면 그 인간 자기 영혼의 절대성도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마저 하나님에게 압수 당해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통치당하게 된다면 더 이상 자기 절대성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리사이고 우리 성도들은 그 요리사가 필요로해서 동원한 음식 재료들입니다. 어떤 음식이 나오든 간에 참으로 예수님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구원된 것은 하나님이 원해서지 결코 내가 원해서 내가 구원된 것이 아니다”라고 고백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 파당이 생겨서 다른 파당과 다투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라고 합니다.
즉 십자가는 오로지 성령을 통해 직접 자기 백성에게 전달되고 믿게 되기에 경유한 것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절대성을 늘 십자가 앞에서 포기토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