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1-4 /산 밑에서
산 밑에서2005년 12월 4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2:1-4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32: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
32: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산은 원래 인간들이 사는 영토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께서 좌정하셔서 이로서 신 킨의 세계와 산 위의 세계가 분리되어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감히 하나님이 좌정하신 산 위의 세계까지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거 바라보기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산 위의 세계로 호출된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모세입니다.
하지만 그 모세는 영영 산 밑의 세계로부터 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예상 밖의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올 줄 모릅니다. 이로서 모세는 산 밑의 세계로부터 사라지고 잊어진 존재가 되어 버맀습니다. .
이로서 산 위와 산 아래가 분리되어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산 밑에서 나름대로의 진리와 복음과 신의 계시를 제조해낼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본색이 충분히 드러나도록 기회를 주고 자리를 마련해 준 셈이 됩니다. 산 위로 올라간 신에 속한 모세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산 밑의 세계는 신의 계시나 진리없이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신 밑 세계의 구성원이 요청하고 원하는 진리 만들기입니다. 이 진리는 그들의 의논하기 나름입니다. 그들이 결정짓는 것, 내세우는 주장들은 다 진리의 요소들로 가입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는 것 속에서 절대적인 것을 만들어내어야 될 상황이 들이 닥친 것입니다. 누군가가 산 위에 올라간 사람을 대신해야만 합니다. 이제 산 위의 세계는 있으나마나가 되었으니, 진리의 계시는 자체적으로 장만해야만 합니다.
어떤 식으로 처신하면 될까요? 위가 막혀있고, 위에서 오는 소식이 없다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지혜는 바로 옆사람과 앞으로 운명의 길을 같이 가야할 이웃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지켜줄 자들이 서로들 밖에 없습니다.
이로서 그들 전부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될 단일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려줄 신이야말로 참된 신이 될 것입니다. 누구를 탈락시키고 누락시키는 그런 신이라면 결국 각자 각자 자신 신을 따로 만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단체가 되지 못하고 일일이 분열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전부들 오직 하나의 신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들이 전부 사는 식으로 마음을 굳혔고, 그런 마음들이 일치를 이루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일체된 마음이 진리의 신으로, 자신을 전부 살려내는 신으로 구현되어 나온 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자신들의 요구와 희망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달성해주는 협조할 수 있는 신을 말합니다. 반대로 참된 신을 인간의 모든 요구와 희망을 부정해버리고 거부하는 신을 말합니다. 우리의 소원대로 되지 않게 하시는 신이 참된 신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비진리의 기준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들을 모두 산 밑에 사는 ‘산 밑의 주민’입니다. 우리는 산 위에서 무슨 소리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를 기대해야 하고 모세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 전부가 다 모세를 포기할 때까지 산 위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 속에 솔직하고 담대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그 우상이라는 우리 복제물이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바깥으로 내뱉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직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에게 적체되어 있는 기억에 의해서 상상해낸 신만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신봉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실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천상의 계시자를 피하게 만들어서 죄인들이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죄들을 품고 있는지를 그대로로 노출시킬 작업을 하나님께서 개시하셨다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됨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또 다른 무엇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악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선악 지식으로 자아를 규정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과 악이라는 지식으로는 인간을 전적인 죄인으로 몰아세울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전적으로 죄인’이라고 몰아세우기 뭐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과 악과의 비례를 따져서 정도에 따라 죄인됨과 의인됨을 구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일단 신이 제조한 마당에서는 오로지 그 신에 대한 정성과 성의문제로 ‘덜 죄인인가’ 아니면 ‘더 죄인인가’가 판가름 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적으로 봐서 이미 산 밑에서 내려온 이상, 산 밑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죄인입니다. 마치 십자가 밖에서는 모든 이가 죄인 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될 수 있는 한 자신이 죄인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행동에 나섭니다. “자, 이래도 나를 죄인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신을 제조하는데 있어 자신의 재물과 정성과 성의가 거기에 함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산 밑에서 만들어내는 신은, 인간의 성의와 정성이 한데 뭉쳐져서 만들어낸 가짜 신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된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자신을 구원시킬 권리조차 그 바탕 위에서 정당한 이유를 얻어낼 수 없는 겁니다. 즉 인간이 당연히 지옥을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지옥 가지 않는 나’를 새로운 양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에서는 자신을 마땅히 지옥 보낼 이유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저 일반적 존재에서 나온 하나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욕심없는 존재자’인 것으로 족하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참으로 지옥이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제깍제깍 그곳으로 몰려들 가고 있다면 그러한 상황을 말하지 않고서는 배기기가 힘듭니다. 바로 산 위를 아는 자들은 이처럼 산 밑의 것만 아는 자들에게 이런 과격함으로 비치고 다가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산 밑은 우상공장입니다. 지금도 매일 같이 제조해 냅니다. 한 시도 쉰 적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작업들입니다. 타협할 여지가 전혀 있습니다. 용납해줄 종교라는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간을 위한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허구입니다.
사람들은 유(有)에서 신을 창조합니다. 있는 데서 가치 있는 것을 제조합니다. 가치있다고 간주하는 '있음'이 생겼다고 여기는 것은 그만큼 그런 것을 제조한 제조자 자체가 선하고 가치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물로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볼 하등의 이유를 발견치 못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활동에 주목합니다. 그 외에는 아예 생각도 안합니다. 자기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제공한 것으로 신이 등장해야 비로소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합니다. 만약에 신이 등장했는데 자신이 그 신에게 제공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 이후 그 신이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해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정당성이 상실되어 버리는 사태가 생기기에 그런 신을 거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이 자신을 공격하고 심판해도 할 말이 있는 그런 신을 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의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피에 한방울의 인간의 피가 섞이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님을 믿지 말고 도리어 우리의 우상성을 들추어내는 하나님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