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0:11-16/목숨 값
목숨 값2005년 11월 6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0:11-16
30: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30:13 무릇 계수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30:14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30:15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30: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구원이 대해서 짧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니다. 누가복음 15:32에 보면,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잃었다고 얻는 것'이 구원이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여전히 잃어버린 자이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죽어있는 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들은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은혜가 주어지든가요?"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뭐라고 답변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명의 속전'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받은 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즉 "이미 구원받은 자들아, 너희들이 구원받은 뜻으로 생명의 속전을 내어라"라고 요청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받은 자들은, 구원받은 자 나름대로 하나님에게 표현해야 할 바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생명의 속전 내기'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속전이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이길래, 잃었다고 우리 목숨도 도로 얻게되고, 죽었다는 목숨도 도로 살게 살게 되는 겁니까? 이 점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라도 생명의 속전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생명의 속전은 부자라고 더 내는 것도 아니요, 가난한 자라고해서 덜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부자란 많이 소유한 자요, 가난한 자는 적게 소유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즉 소유관점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하나님으로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생명이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전혀 차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인간이 자기 소유로서 자신의 구원의 유리와 불리를 측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가진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성전세를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속전이 모아져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바로 성전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 성전에서는 아침 저녁마다 흠없은 어린 양이 희생제물로서 태워집니다.
바로 이러한 반복적인 희생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주는 생명은 근원이 되는 겁니다. 성전세를 내라는 것은 곧 현재 너희 전체가 애굽에서 나오고 이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원래 하나님 것이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인간 본인들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생명의 속전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비용이 아니라, 이미 어린 양의 희생으로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어린 양의 희생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하나의 방식이 됩니다. 신약 시대의 표현으로 하자만 우리 목숨을 대신하신 메시야의 목숨 값이 반 세겔이라는 겁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목숨 값으로 반 세겔이라고 제시하므로서 자기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값을 매기는 권한 자체를 하나님께서 박탈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명값이 과연 반 세겔에 불과합니까? 그 해답은 요한계시록 22:17에 나와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기에 보면 생명수 값은 아예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1:18-19에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은이나 금'으로 자기 목숨을 포장한다고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목숨값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성도의 목숨값은 다른 분이 대신 치러주셔야 하는데 그 값은 바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인간의 은이나 금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가 구별없이 동일하게 반 세겔씩 내어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모두들 자기 고유의 가치는 날라가 버린 상황에서 오직 하나같이 예수님의 가치에 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가치성을 그대로 유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6장 초반에 보면, 우리 인간들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희한한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름하여, '불의한 청지기 비유'입니다. 그 직원은 자기가 소속해 있는 회사를 위하여 일하기 위해 채용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주인님에게 밉게 보여서 얼마 안 있어 쫓겨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이 불의한 직원은 자기 장래를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주인님의 재물에 손실을 입히면서까지 과도히 자기 살 궁리에 몰두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 가게와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기름 100말 같으면 50말로 장부 조작해 주기도 하고, 또는 밀 100석 같으면 80석으로 감해줍니다.
누가봐도 사문서 위조범입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함부로 탕감해주어서 호의를 쌓아놓았다가 얼마 안 가서 퇴직할 때를 대비하여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런 악한 짓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기에다 누가 봐도 비난 받을 짓을 했습니다. 자기 장래를 대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선한 일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불의한 일은 어디까지나 불의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불의한 짓보다 더 불의한 것은, 인간의 현 목숨이 죽고 죄악된 목숨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지려 오신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못알아보는 그들이라는 겁니다. 즉 자신의 현 목숨이 정상이라고 우기는 작자들이 이 불의한 자보다 더 저주받은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여전히 자기 목숨을 정상으로 보는 것은 참으로 예수님의 심오한 십자가의 의미를 모독하는 지옥의 자식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