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9:26-30/요제와 거제
요제와 거제2005년 10월 16일본문 말씀: 출애굽기 29:26-30
29:26 너는 위임식 수양의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으라 이는 너의 분깃이니라29:27 너는 그 흔든 요제물 곧 아론과 그 아들들의 위임식 수양의 가슴과 넓적다리를 거룩하게 하라29:28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 영원한 분깃이요 거제물이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취한 거제물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물이니라29:29 아론의 성의는 아론의 후에 그 아들들에게 돌릴찌니 그들이 그것을 입고 기름 부음으로 위임을 받을 것이며29:30 그를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섬길때에는 칠일 동안 그것을 입을찌니라
이스라엘 나라는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애굽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인격이 변했다는 말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요구하시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애굽 나라는 이미 홍해 바다를 사이를 두고 전혀 다른 나라가 되어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 바다를 무사히 통과한 집단이요,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 바다라는 장애를 이기지 못하고 몽땅 물에 빠져 몰살당했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죽음을 이긴 생명이 작용하는 영역권 속에 놓여 있다는 말이 되고, 애굽 나라에는 여전히 죽음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집단이라는 말이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동일한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는 결코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본주의 원리만이 진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못합니다. 죽음을 이긴 그 무엇의 능력에 휩싸여서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삶이란 소유물을 자기 노동으로 축적해놓고 그것을 빼먹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의 등장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제나 거제는 제사장이 마땅히 가져도 되는 자기 양식임을 백성들에게 전시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집도 절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곧장 들어선 곳은 바로 물이나 양식도 넉넉지 않는 환경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정립해야 했습니다. 애굽식의 방식으로 항상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투 밖에 안됩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은 제사장의 면면을 전면에 내세우십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여전히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몰두해 있는 처지입니다. 뭔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대신해서 보여줄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땅 갖기를 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제사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구원의 능력을 여전히 제공하시는 그런 하나님에 의해서만 통치받는 나라되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즉 어린 양의 희생이 인간의 소유욕으로 인해 퇴색되지 않고 도리어 그런 소유욕을 계속 정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땅을 소유하게 된 일반 지파의 백성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의 존재란 자신의 소유를 가능케하는 발판으로 작용할 때만 의미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 많은 소유를 보장해 줄 때만 하나님과 교제하겠다는 분위기로 급속도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농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땅도 갖지 못한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이 찾아오게 격이 됩니다.
백성들의 하나님 무시하기가 그대로 제사장 무시하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백성들은 제사장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기분 내끼는대로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없이는 못산다는 차원에서 제사장의 생존을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즉 제사장이 없어도 하나님만 있으면 산다 라는 계산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통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존재 자체가 인간들의 기본적인 욕구, '소유가 있어야 안심이다'라는 욕구를, 죽음도 이기지 못하는 애굽정신이라고 고발하는 기능을 제사장들이 하는 기능에 의해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31-34에 보면,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먹기 위해 이 땅에 사신 분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시는 겁니다. 즉 왜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그 이유가 예수님을 살려내는 양식 같은 힘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저 땅이 있어 땅에 나오는 소산물을 의지해서 사는 것은, 인간들이 애굽정신에 준해서 하나님을 이용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인간들은 궁극적으로 애굽으로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도리어 애굽에로의 합세를 원합니다. 진짜로 인간들이 내면에서 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탈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흔드는 제물'과 '쳐드는 제물'을 가지고 시위하듯이 백성들에게 호소합니다. 여기 이 제물을 흔들고 쳐드는 것처럼 너희 백성들아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이처럼 쳐들고, 흔들면서 너희들 앞에 그들의 존재성을 잊지 않기를 당부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쳐들었고 흔들어대든 제물은 결코 타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먹여주는 제물이 되고 그 제물의 제공은 너희 백성들이 담당하여 너의 인생과 제사장의 존재함과 계속 관련성을 잇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도 이러한 분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4-8에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도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다닐 권리도 있고 소요되는 비용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는 자비량 한 것은, 생명이란 인간의 노동의 축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는 복음을 생명을 바쳐서 증거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이미 받은 상(償의)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능력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참된 성도의 모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그저 주신 생명을 우리의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모독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