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5:10-22/속죄소
속죄소 2005년 7월 24일본문 말씀: 출애굽기 25:10-22
25: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25: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25: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25: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25: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25: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지며25: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25:17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25: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25:19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25: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25: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때, 오로지 '속죄소'에서 만나십니다. 다른 장소에서는 절대로 만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인간을 저주할 근거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에서 만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마치 그곳은 시골 아궁이 같습니다. 시골 아낙네들은 야산에 올라가서 솔갈비나 낙옆 같은 것을 끌어모아와서 사정두지 않고 아궁이 속에 쳐놓어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처단하는 아궁이로서 속죄소를 장만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성보다 더 진실된 것은 없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무서운 죽음을 보여주는 존재에 해당됩니다. 죽음으로 들어서지 않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속죄소는 바로 이와같은 진리를 똑똑히 보여주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기서 인간과 만나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인간이 자신의 실상을 속일 수 없도록 말입니다. 거기서 인간들은 비로소 죄의 실상을 접하게 됩니다.
속죄소 밖의 세상에서의 죄 개념과 속죄소에서의 죄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의 죄란 세상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고 타인의 생명과 신체를 파괴하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전엄성과 품위를 손상하는 것을 그들은 궁극적인 죄라고 간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복음이야말로 이 세상의 안목에서 볼 때 가장 우려하는 죄악 중에 죄악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으로보면 죄인 중의 괴수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유의 가치와 품위를 묵사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존재의 함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성막이나 속죄소에는 인간의 비명이 울러나옵니다. 생명있는 것들이 최후의 지점에서 질러보는 절규입니다. 이곳에는 더 이상 자존심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저 뜨겁고 맹렬한 저주의 불길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야 될 곳입니다.
히브리서 12:20-21에 보면,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실이란 이 세상에서는 오로지 죽음으로만 드러납니다. 죽음의 모습이 아닌 진리는 진리도 아닙니다. 속죄소 밖에서 통하는 의로움이나 진리란 인류 사회 번영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소위 '공동의 선(善)'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참된 의로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의로움을 위해서 일하게 되면 그 인간은 참으로 가치있는 인간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들은 속죄소 앞에서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내세운 '공동 선'을 위한 기준들은 하나님의 진노만 야기시킬 뿐입니다. 이처럼 속죄소의 기능과 구조는 하나님의 진노가 왜 떨어져야 하는가를 보이는 장치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6:14-19에 보면,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 같이 할 것이요 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 할 것이며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찌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피는 인간의 피는 아닙니다. 인간의 피는 도리어 진노를 유발시킬 뿐입니다. 레위기 17:10-14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찌니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볼 때에 더러운 피, 곧 부정타는 더러운 생명이라는 본질을 갖고 있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죽고 나면 그 속에 있는 본질이 그대로 노출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뿐입니다. 그래서 속죄소에 뿌려지는 피와 그 피를 내게 하는 불은 반드시 제단에서 제공되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속죄소란 어느 상자 위의 뚜껑을 의미합니다. 보통 상자란 상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물에 의미가 담기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케이크 선물을 받았다면 그 포장지를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케이크가 더 소중한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상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연적으로 우리는 그 밀폐된 형식의 상자를 받았으니 안의 내용물에 궁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상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즉 '아무 것도 없음'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담긴 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케이크를 선물을 드렸다고 전화로 알려주었는데, 전화 받은 분들이 실제로 포장지를 뜯어보니 케이크는 간 곳이 없이 그 케이크를 남김없이 다 뜯어먹은 못된 개미들만 소복히 들어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치로서 상자가 우리 인간에게 전달됩니다. 즉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시킨 인간들의 못된 악마적인 성품만 가득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평소에 미워하고 원망한 증거품들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지었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흔히 포장자를 우습게 보기 십상인데 언약궤 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상자 속에 내용물을 덮어주는 그 뚜껑이 바로 속죄소, 즉 '죄를 씻어주는 장소'가 됩니다. 다른 말로 '시은좌'라고도 하는데 시은좌란 은혜가 내려앉는 좌석이라는 뜻입니다.
그 위에 천사가 사수하듯이 속죄소 뚜껑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 자체를 보고하기 위해 천사로 하여금 파수하게 하시는 원칙이 이 속죄소 뚜껑 위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자 그런데 이 속죄소를 만들었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무너져야할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모형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8:4-5에 보면,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는 모형의 자재로서 실체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결코 자신의 모형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실체적 행위로 구원받았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존재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십자가 앞에서 무너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