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5:1-9/예물의 용도
예물의 용도 2005년 7월 17일본문 말씀: 출애굽기 25:1-9
25: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25: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25:4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25:5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25:6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25:7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사람들은 '주시는 하나님'은 대단히 좋아들 합니다. 하지만 '강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대단히 싫어하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뭘 바치라고 한다면 마지못해 동냥하듯이 주고 싶어합니다. 결코 즐거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사람은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오고 나면 자기 존재가 더욱더 강력하게 굳어져 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로 자기 인생관에 큰 낭패를 안겨다주는 식으로 다루시게 됩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낙담하고 절망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면 인간은 참으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뭉개버리고 그의 비젼과 희망과 꿈을 망쳐버리시는 식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가 구약에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는 요나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 속에서도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일을 하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의 일에 실망해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 자살 방법은 땡볕에 자기 몸을 노출시켜 강한 자외선에 피부암을 유발해서 죽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상 밖의 박넝쿨이 자기 곁에서 속성으로 자라나서 자기에게 그늘이 되어주니 그 하찮을 것 없는 것에서 큰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박넝쿨을 조성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일부로 그 박넝쿨을 말라죽게 했습니다. 그러자 요나 선지자는 큰 낭패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내미신 손길에 따라 요나에게는 의도적으로 큰 낭패가 발생되었습니다.
이것은 요나 선지자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것, 그 자체도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돌려서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그 판단력 자체가 허물어져야만 합니다. 그 이후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데 동원된 일꾼으로서만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 한 사람 엘리야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열심히 하나님께서 시킨대로 복음을 전했건만 이세벨에 의해서 죽음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엘리야 선지자는 로뎀나무 아해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엄청나게 큰 기적 속에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을 타고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일은 차질이 생기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 위주로 세상이 판단하기에 우쭐대거나 아니면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것 모두 제대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즐거이 드림'이 어떤 마음입니까? 역대상 29:14에 보면,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도로 가져가시는 겁니다.
왜 도로 가져가시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과의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전을 짓기 위해서 갖다 바쳐라 는 겁니다.
성전은 무엇입니까? 성전이란 전쟁의 용사기념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홀로 전쟁을 진행시켜 혼자만의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쳤음을 대대로 증거하는 기념관이 곧 성전입니다. 따라서 이 성전을 짓기 위해 동원된 모든 물품은 인간이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치러시는 전쟁으로 인해 획득된 전리품으로 충동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12:35-36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10재앙을 거치면서 이제 애굽은 완전히 이스라엘과 하나님 손아귀에 놓이게 됩니다. 10 재앙 가운데서 가축이 죽는 재앙도 있었는데 그 재앙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가축은 이유없이 몰살되어야만 하고,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축은 이유를 모르는채 멀쩡해야 합니다. 이것은 애굽 가축이든 이스라엘 가축이든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주관 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빠져나오면서 빈 손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많은 재물과 패물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재물과 보석들이 오늘 본문에서 성전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제공되는 겁니다. 이로서 성전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홀로 승리하신 그 승리를 기념하는 물품으로 가득채워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바친 것으로 성전을 짓는 겁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서 옛언약 시대가 아니라 새언약 시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옛언약에서는 인간이 바친 것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주셨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님 몸 안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은 십자가 사건에 기초한 능력으로 작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만난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자기 실망과 자기 절망을 안게 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합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내놓은 헌금이란 단지 자신의 것이 침해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 동냥하듯이 헌금하게 됩니다.
즉 '즐거이 내는 헌금'이라는 것이 단지 자기의 것이 공격받지 않는 경계선 밖에서만 즐거이 내는 것이 되고 만약에 조금이라도 그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즐거이 내는' 것이 아니라 강력 반발하든지 아니면 일종의 투자 용도로서 헌금에 나서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는 성전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기 요령과 기부하는 양심을 찬양하는 거짓 성전이 될 것이 뻔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통해 늘 자신을 의지하지 말게 해주옵소서. 날마다 자기에게 실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