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2:1-4/배상법
배상법2005년 3월 27일본문 말씀: 출애굽기 22:1-4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22:3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22:4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찌니라
하나님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상법도 이와마찬가지입니다. 배상법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피해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피해자란, 항상 자기가 유리한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피해 보상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제대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7:12에 보면, 하나님의 법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법 안에 사랑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 같으면 하나님의 배상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피해를 보상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의 법의 완성으로 간주하기 십상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안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나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피해 보상은 강도한테 청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는 것도 법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는 것도 법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왠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이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대접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겁니다.
즉 이 사마리아인의 머리 위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준해서 그 사마리아인은 사랑을 실천해 옮기는 겁니다. 이처럼 피해보상에 관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그 법을 완성하는 형태는 반드시 사랑으로 등장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관한 예가 또 있습니다. 사무엘하 12:1-6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 양 새끼의 4배나 갚아야 된다'는 판결을 다윗 본인이 내리고 있습니다. 왜 4배입니까? 4배나 갚아주는 보상은 피해자의 무슨 피해에 대한 보상입니까? 그것은 '저에게 딸처럼 되었다' 자비심에 대한 보상입니다. 만약이 이 자비심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단지 한 마리의 양을 보상하는 것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자비로 이루어진 가족을 깰 수도 있습니다. 이로서 가족이라는 것이 타 가족을 괴롭게 하는 현실적 존재가 됩니다. 나의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타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가장으로 계시는 가족같은 이스라엘에게서 용납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배상이란 반드시 피해자가 등장해야 합니다. 보상은 피해자에게만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 사회에서의 보상이란 '자신의 것'이 손해를 봤을 때 그 손해를 입힌 측이 보상을 해야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든 것에 의하면 부자는 자신의 것을 손해 안보기 위해 가난한 자의 하나 뿐인 양을 대신 희생 시켰습니다.
만약에 양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면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품이 덜 합니다. 하지만 단 한 마리만 있는 양이란 온 식구가 정성과 관심과 사랑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따라 그 양을 잃은 것은 그 가난한 가족의 전 재산이 상실한 아품을 유발합니다.
이러한 나단 선지자가 든 예는 율법이 자비와 관련있는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솔로몬의 재판가운데서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상 3:25-26에 보면, 같이 자기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여인네들 가운데서 마음이 첨예하게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여기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솔로몬은 부모, 자식간에는 형식법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자비로 맺어진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법의 내부를 들여다볼 줄 아는 것이 바로 솔로몬이 가진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완벽한 법은 오직 예수님만 이룰 수 있는데 그 이유가, 그저 주시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향해 퍼부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짊어 지신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것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일일이 나누어 주심으로써 아예 우리 자신 속에 예수님의 의가 담기게 하시는 것까지 마무리 하십니다. 바로 이런 일까지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들의 하나님의 법 사용은 항상 법을 준수를 조건으로해서, 자신을 보다 유리하게 가져겠다는 심보로 움직입니다. 베풀기는커녕 자신이 계속 강자로 남겠다는 의도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는 불신앙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법을 이루었다고 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