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3/다른 신
다른 신2004년 12월 12일본문 말씀: 출애굽기 20:3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나'라고 지칭되는 신이 나오는 반면에 또 '다른 신'이라고 불리 우는 신이 나옵니다. 어떻게해서 신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되고 마는 겁니까? 이런 논리 자체가 '최고 자리'라는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에 가면 온갖 민족이 살고 있으면 각 민족마다 자기 민족이 신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은 최고라는 민족이라는 것을 기치로 내세운 신들을 만나게 됩니다.
즉 신이 많다는 것은 실제로 신들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된 품성으로 인해 이 세상에는 각종 신들이 등장되고 있음을 현실로 받아들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신들 중에 어느 신이 참된 살아있는 신이겠습니까?
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하나님은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 내용은 바로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거나 이룰 수 없는 내용입니다.
하기 힘든 일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던 일을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일을 시행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일을 하다고 버겁고 어려워 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식이 아니라, 인간들의 요구가 뭐였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은 자기 백성을 통해서 시행해 버린 것이 되고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과 협상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배제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참된 신과 가짜 신은 이 '언약'으로 결정됩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흔히들 참된 신과 이방 신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위일체'라는 아이디어를 등장시킵니다.
즉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자는 같은 동지에 그렇지 아니하면 다 이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른 종교에서도 이런 삼위의 일체, 혹은 일체적 삼위성이라는 신적 이미지는 다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의 예를 들면, 무한한 우주 전체의 내부에 흐르는 어떤 규칙이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는데 그것이 '법'입니다. 부처는 바로 그 법 자체입니다. 이것이 법신입니다. 일종의 성부에 해당도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무한함 속에서 그냥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자기 상상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신이 눈에 띄는 인간적 모습으로 변모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화신'입니다. 인간으로서의 부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무한한 부처와 유한한 개체로서의 부처와 연결이 되어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인간들도 개체에 머물면서 언제가는 무한한 법식과 접촉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사시켜주는 것이 보신이라는 겁니다. 이 보신은 성령에 해당됩니다.
하나의 진리가 삼중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아이디어는 이처럼 불교에도 엄연히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삼위일체 신론이란, 인간들의 이성으로 신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고 인간과의 관계성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발상의 산물에 해당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러한 종교적 욕구에 부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 심판을 전제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를 들어보면 노아의 경우입니다.
창세기 6:18에 보면,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언약' 때문이고 그 '언약' 아이디어는 노아의 발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출애굽기 4장 5절을 살펴봅시다. "출 4:5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애굽기 6장 2절에서 5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라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완수하기 위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언약이 신약에 와서는 어떻게 행사하는가 봅시다.
골로새서 1:13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흑암의 권세'라는 것이 그 권세 안에 놓인 사람이 자력으로 빠져 나올 수 있는 겁니까? 없습니다. 그리고 '흑암의 권세' 안에 놓여 있는 자들 입장에서 왠지 자신을 악한 자편에 속했다고 생각을 하고 싶지를 않을 겁니다.
그 대신 이렇게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해도 나는 건전하고 괜찮은 사람일꺼야. 그러니까 자력으로 잘 버티고 구원될 수 있어"라고 말압니다. 이런 발상이 큰 오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 할 때, 결코 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외쳤다고 구원된 것도 아니요, 홍해 바다 한 가운데를 친히 걸었다는 것이 장점으로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즉 구원에 동참하게 되는 그 동참 자체가 결코 자기 선행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어린 양'의 피로서 그 피에 동참하지 않는 모든 인간을 다 죽이고자 하는 심판성이 배경으로 깔린 채로 오직 언약 성취용으로만 구원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어린 양의 피'를 거부하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 피가 곧 '언약의 피'입니다. 거기에 참여시켜서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내용을 지녀야만 참된 신입니다.
호세아 6:6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 당시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초칭하고, 그리고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려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바알 종교의 재탕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력으로 구원 못됨'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등장으로 확실해졌습니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만으로 다가 아닙니까? 인간들의 자기 구원에 대한 열망과 욕망은 자신에게는 무슨 선함 쪼가리라도 기어이 찾아내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은 영원히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보내신 예수님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자가 참된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행함으로 선한 것을 찾을 생각말고, 왜 자기를 제치고 주님이 나서야만 했던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