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5:22-26/원망스러운 공간
원망스러운 공간2004년 8월 8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5:22-26
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15: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서, 같은 인간들 입장에서 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일부로 인간들에게 병 주고 약 주시는 것 같습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놓고서 인간으로 하여금 일부로 분노를 유발하도록 조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모세의 입장에 서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세를 공격하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보이지도 않은 분과 대화하고 지시 받으며 산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나 심적으로 큰 압박이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같이 합세하며 의견을 조정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친숙하고 정이 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자꾸만 모세 중심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것입니까?
세상만 바라보면 자신의 죄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자신의 죄를 모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 엉뚱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원망'이라는 것이 왜 나타나느냐 하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어서 나타나는 겁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 만나러 갑니다. 하지만 일반 민중들은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기 보기는 하루하루 살아남는 일에 모두를 바칩니다. 사실 이러한 광야에서의 민중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겁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 만나 보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도리어 이리 핑계 저리 핑계를 대면서 교회 나오는 것도 싫어하는 것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장엄한 분인지를 압니다. 이제 모세가 앞장서고 백성들이 모세 가는데 까지 합세하는 형식으로 하나님 만나러 가는 여정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 광야의 노선은 그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하는 원칙인 것을 말해줍니다.
즉 "옛날 신앙의 선배들이 광야에서 이러 이러한 일을 해서 그들이 망한 것처럼 오늘날 너희들도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기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실감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어 제일 무지한 면은, 자아라는 것이 있어 그 자아가 자신의 신체나 자신의 정신까지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의 신체나 주위 환경에 따라서 인간의 자아는 거기에 맞게 조정되어 나타나는 법입니다.
인간은 '육'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이 곧 인간이요, 인간이 곧 육입니다. 육은 육의 속성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 어떤 주장을 늘어놓고 혹은 자기 괴로움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은 백이면 백, 자신의 욕망이 다 충족되지 못해서 터져 나오는 소리입니다. 어느 정도 잘 사는 사람도 늘 불만과 정신적인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자기 육에서 나오는 욕심을 본인이 감당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흔히 말해서,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나오는 분풀이'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자기 뜻'이라는 뭡니까? 왜 그런 뜻이 꼭 성취되어야 할까요? 여기에 아무런 해답도 없습니다. 그저 '나'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니까 무조건 '내 뜻'도 같이 등장되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라는 인간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고, 그 '나'를 중심으로 한 '나의 뜻'도 병행해서 튀어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되면 세상 만사는 그 '나'라는 작자 중심으로,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이든 하나님이든 자연세계든 모두 그 '나'라는 인간의 뜻대로 순종해야 될 무슨 특별한 비밀이라도 담겨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나'라는 인간의 뜻이 수시로 변하고 날로 더 커지고 스스로 만족함이 없고 완성도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속에 있는 욕망조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모순 점을 안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주의 법칙도 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유 없이 무조건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가야 한다고 우겨대는 이런 짓거리에 대해서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은 무서운 저주와 진노로 대처하시게 됩니다.
왜 지옥이 있는 줄 아시겠습니까? 인간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서 그 죄를 모르고 있으니 진노 받아도 마땅한 것입니다. 정말 신을 아는 자는 결코 인간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모르는데서 오는 모든 원망과 불평을 한 몸에 다 담아내야 하는 쓰레기통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인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입니다. 전에는 모세 혼자서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지금은 집단을 이루어 그 하나님을 뵈려 갑니다. 과연 곱게 그냥 갈 수 있을까요?
자기 주제 파악도 제대로 안 된 무리들이 과연 그 마음 뜯어고치지 않고서 하나님을 뵐 수 있을까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코스는 전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 경지라는 것은 바로 신발을 벗는 경지입니다. 욥기 42:1-6에 보면,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지로 통하는 코스가 광야라는 코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존재할 이유는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때까지 그들은 과거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 방식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발췌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망'이라는 모습으로 바깥으로 튀어나옵니다. 하나님은 원망과 도와주심을 반복하면서 그들의 내부를 그들로 알게 합니다. 즉 원망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사태를 자꾸만 만들어내십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그런 코스를 유도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쓴 물이 고인 곳으로 인도합니다. 먹지 못할 물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당연히 원망을 쏟아냅니다. 왜 그들은 물을 먹어야 하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물을 먹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근본적인 자리로 묻고 계십니다.
즉 너는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가를 물으시는 겁니다. "그동안 너는 누구에 의해, 무슨 목적에 의하여 위하여 살아왔다고 생각하느냐?"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잘 알아서 그동안 지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극한 상황에서는 더욱더 자기 밖에 모르는 악독한 자아로 돌변해 버립니다. "아,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어쩌면 이것이 나의 본심이다면… " 이 악독한 면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는 심하게 짓밟아 왔습니다.
이제 그 근원을 이 광야 코스를 통해 분명히 해두겠다는 겁니다. 자기의 절대화 때문에 가리워 졌고 무시당했던 원칙을 이제 아무 것도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환경 안에서 처음부터 새로 정립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웬 나무 조각을 던져서 쓴 물을 단 물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 자신이 기껏 쓸모 없는 쓴 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우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쓴 물이나 적당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 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나무 조각을 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단물을 먹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란 자기를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을 알 때만, 하나님의 은총을 비로소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리고 되찾는 작업을 시행하심으로서, "네가 너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께서 친히 너를 기어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관리하고 구출시킨다"는 그 성의를 깨닫게 하시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치료하시는 하나님 상'입니다.
비 한 방울, 물 한 모금, 이 모두가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치료할 수 없다는 점을 제대로 알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적인 생계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를 단 물 되게 하신 주님의 희생을 잊지 않도록 조치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 관리 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게 하옵소서. 세상 적으로 구상한 자아상을 버리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