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0:1-5/메뚜기 재앙
출애굽기 10:1-5/메뚜기 재앙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메뚜기 재앙
2004년 2월 29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0:1-5
10: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10:2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10:4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10:5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들에 너희를 위하여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바로왕과 모세의 대결은 마치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둘 중의 어느 한편을 우리가 임의로 골라잡아 선택해서 자기 운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왕이 비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늘 책망을 받고 정죄를 당하는 입장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들조차 바로왕과 무관한 초연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바로왕 안에 이미 우리가 놓여 있으며 현재 우리들이 바로왕의 심보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로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모세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그 둘 중에 하나로 골라잡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바로왕이며 어쩔 수 없이 바로왕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바로왕에게 책망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책입니다. 이와같은 경우가 신약에 들어서면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쉽게 자신들이 자진해서 예수님 편에 서기로 작정한 자들 같지만 제자들 마음 속에는 여전히 바리새인과 동일한 품성을 지닌 채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에게 질책하는 것이 그대로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과 같이 합세해서 바리새인들을 비난했던 그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예수님 곁에서 도망친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바로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왜 겸비치 아니하느냐?"라는 겁니다. 자... 도대체 무엇이 겸비치 않는 겁니까? 그것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것이 겸비치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마음이 겸손하다든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조작해 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개인에게 주시는 사건 안에서 비로소 '겸비'의 현상과 '섬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조작해내는 방식과 양식에 따라 겸비하고 섬기려는 것은 곧 자신의 겸손을 섬기는 것이요, 자신의 하나님 섬김을 겸손으로 이해하려는 소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에 원하시는 겸손함과 섬김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터져 버린 사건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예에 대해서 제가 예레미야 20:7-11의 경우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성격과 더불어 예레미야의 성격이 같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지금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힘이 한데 엉겨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진정한 섬김과 겸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진해서 하나님을 일을 하고자 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겸손과 섬길의 형식과 유형과 예를 갖고 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바가 아닙니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버렸다는 것이 관권입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예레미야는 몸부림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일을 안하겠다는데 왜 저에게 하나님의 일을 시키십니까?"라는 데서오는 몸부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나온 겸비와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한 겸손과 섬김입니다. 이 예레미야의 고통과 심정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사도 바울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그대로 이어 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열심히 탈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떼 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레미야는 이 점을 압니다.
하나님이 도리어 자신을 이기고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의 자기 밖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이 현장에 침입한 하나님으로부터 알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은 자기의 의도한대로 인생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긴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이 두 현실을 다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 진정 오늘날 성도가 느끼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성도에게 찾아 드시고 인도하시고, 일시키시고 있는 겁니다. "나는 안 하려고 했고, 나는 그냥 멀 발치서 하나님께 겸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평범한 신자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쳐들어왔고 나를 정복하고 덮쳐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4:11-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에게 생겨나는 상황은 사도가 순교하기 위하여 억지로 조작해내고 은근히 유발하기를 기대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 같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를 전혀 예상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압니다. 고린도전서 10:22에 보면,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사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해서 늘 승리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에게 늘 패배 당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여기서 '모든 것'이란 자신이 미리 점쳐놓은 기대나 야심이 아닙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늘 자기를 이겨주시는 예수님이 생각해 놓으신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일들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도 날마다 사도 자신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자신은 그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자로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궁핍이나 환란이나 그 어떠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섬김이요 겸손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의지력을 아예 기대치 않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 다음으로 자기 걱정을 하기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는데 내가 이렇게 막 살아서는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는 자를 원하신다는데 내가 그만 있을 수는 있겠는가"라는 인간적인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절차로는 나름대로의 겸손과 섬김의 틀을 갖추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목사에게 묻기도 하고 다른 선배 교인들의 스케줄을 참고로 해서 편리한 대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섬김의 유형을 조성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하루 스케줄을 고려해서 예를 들어, 2시간 반을 기도하는 것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대체할 수 있다고 간주해 보는 겁니다. 24시간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하지는 못하지만 자기 형편에 2시간 반을 꼬박 하나님 섬기는데 바치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생각해서 대견스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를 시작하려니 마침 그 시간에 재미있는 연속극이 시작하는 것과 겹치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두 가지 타입으로 섬김의 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연속극 마저 보고 하겠습니다"라는 타입과
"아, 이것이 내 기도를 방해하는 악마의 수작이구나. 성경에 보면 죄와 싸우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데 내가 이 악마가 싸워 이기기 위해서라도 연속극을 안보고 기어이 기도를 끝내야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거의 퇴행성 정신분열증 증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음 한 구석 연속극의 내용이 궁금하면서 억지로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고 방식이 인간적인 섬김이요 겸비라는 겁니다.
우리는 평생을 다 가도록, 자신이 예상한대로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어야 참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승리하심을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했다고 하는 순간이나 못했다고 하는 순간이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나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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