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8:16-19/이 재앙
출애굽기 8:16-19/이 재앙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이 재앙
2004년 1월 11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8:16-19
8: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8:17 그들이 그대로 행할쌔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어 땅의 티끌을 치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니
8:18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하였고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은지라
8:19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신체에 대해 이렇게 직접 고통을 가하는 것에 대해 흔히 '너무 어른스럽지 못한 행위'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괴롭혀서 뭘 할 것이며 약한 인간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고통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약한 대상을 괴롭히고 그것을 보고 즐기는 식이 되어 못 마땅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은 단순히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을 가르치겠다는 차원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부하시기를, "선악과를 따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죽음'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지시를 내린 취지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대상을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아담은 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통고받은 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세계의 깊이를 인간 세계와 온 우주로 가르치려고 합니다.
어떻게 가르칩니까? 창세기 3장에서 내려진 징벌을 보면, 아담이나 하와나 둘 다 신체적 고통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은 신체를 지니고 있는 이상 아무리 정신을 바짝차려도 신체로 가해오는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즉 죽음의 흔적이란 아무리 위대한 마음과 고상한 품위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신체적 아픔에 굴복하고 얼굴을 찡그려야 합니다. 죽음의 흔적이란 비현실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입니다. 즉 죽음이란 그저 눈만 한번 감으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숨만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시작이 아닙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인생의 전부가 죽음이 주는 고통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비록 사랑하는 자녀라 할지라도 죽음의 흔적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이 재앙은 애굽 사람들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 같이 사는 이스라엘 사람도 당합니다.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재앙을 같이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의 흔적을 맛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입니다. 요즈음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전세방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늘의 말씀만 하시는 분이라고 해서 결코 세상에 충만한 죽음의 흔적으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의 좋은 말씀을 하시면 될터인데 왜 이 세상 고통에 흠뻑졌으셔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 신체성은 내 팽개치고 정신적인 구원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으로 그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의 의도적인 작전에 의해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마와 마주치게 됩니다. 여기서 악마는 세 가지 유혹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곧, 생존문제와 과시욕와 소유욕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죽음의 흔적을 충만하게 남기게 한 원인입니다.
그런데 이 생존과 과시와 소유는, 보통 평범한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요 보람이요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없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산다말입니까!
그러니까 흔히들 자칭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셔야만 한다고 우기는 그 내막에는 실은 생명의, 흔적이 아니라고 죽음의 흔적들에 대해서 부푼 꿈을 안고 하늘의 복을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정작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얼마나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이 실상은 죽음의 흔적물들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겁니다.
소위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당한다는 고통과 괴로움은 그 원인이 실은 자신들이 여전히 죽음의 흔적을 열심히 찾고 있는 그 정신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들 불신자들 같이 고통을 겪게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십니까?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인간은 곧 자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죽음의 흔적입니다.
겉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군이라는 치장이요 실제로는 죽음의 세력에 의해서 마구잡이로 허물어져 가는 일반인에 불과합니다. 본질과 겉모습의 엄청난 차이를 나아만 장군은 보여줍니다.
그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엘리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지시만 받습니다. 요단강 물에 7번 들어가서 몸을 씻어라는 겁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가에 서는 순간 그는 너무나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요단강물은 자기 나라 아람의 다메섹강물보다 더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물이 자기 몸을 깨끗케 하는데 유리하다"는 이 인식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만약 몸만 낫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생존-과시-소유'라는 죽음의 속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즉 "어서 몸이 나아서 살아야겠다"라는 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 그는 여전히 죽음의 사슬에 그냥 묶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종들의 간청을 듣고 엘리사의 지시에 따릅니다. 이것은 곧 더 이상 자기 몸은 자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내리는 분의 소유라는 것으로 전환된 순간입니다. 즉 병이 들었던, 병이 나았던 상관없이 더 이상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자기 신체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환이 곧 죽음의 흔적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발생될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상스럽게 일을 하십니다. 일방적으로 교회라고 불러놓으시고서는 천사를 보내어서 지시사항을 주시고, 만약에 이 지시에 따르지 않은 촛대를 옮기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교회를 시작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촛대를 냉정하게 옮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어째서 앞 뒤가 잘 연결이 안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쉬운 예를 들면, 길가던 사람을 불러 세워서 어떤 영화감독이 하는 말이, "엑스트라가 필요한데 시간 좀 내어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래 놓고서는, 그 엑스트라들에게 연기를 지시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제 지시대로 연기가 제대로 안 나오면 나는 당신들을 해고 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길가던 그 사람은 졸지에 감독에게 이용당한 셈이 된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자기가 영화 출연 시켜 주겠다고 먼저 이야기해 놓고서는 이제와서 연기 못하면 영화 출연 못세우겠다고 조치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소유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되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반드시 이렇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받아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종이 맞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니다.
끝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9-10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전 인류에게 노한다'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을 그저 평범한 소시민일 뿐입니다. 크게 남을 해친 적도 없고, 해치고 싶은 의사도 없고, 남을 괴롭히면서까지 생존에 나서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열심히 평생을 소리없이 자세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사는 자들입니다. 죄가 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분노하시는 때를 정해 놓으셨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과연 믿어지십니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죽음의 흔적들과 너무 안일하게 친밀을 유지하면서 그 덕으로 살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도 이런 우리들의 무지 때문에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고통을 당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이 고통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님을 발견한 그 즐거움을 지니고서 남은 여생을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소품인 점을 놓치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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