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6:7-9/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2003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6:7-9
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6: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교회 나오는 사람은, 자기 것과 하나님의 것을 나란히 갖고 있습니다. 평생동안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향하여 자기 것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것'을 잊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소위 '우리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하나님께서 늘어놓으신다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신경은 온통 '나의 것'이 언제 달성될 것인지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살인죄, 간음죄가 죄의 전부입니까? 죄의 대표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에 대해서 아는 바 없이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내어 봅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칭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분명히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은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계획에 마음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백성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이란 피조물이기 때문에 기껏 한다는 것이 유에서 유로 변신하는 것밖에 못합니다. 즉 있는데서 있는 것을 조립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수준은 있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없게 하는 수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딴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솜씨를 믿는다고 자부하기에, 그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을 고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식은 그 내용으로 봐서 뭔가 조금씩 틀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을 제거해 달라"라는 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왕을 쳐부수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왕에게 귀염받으면서 이 애굽 나라에서 편하게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애굽 나라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이가 당장 가시를 빼달라고 엄마 한테 요구하니,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오늘 밤에 너는 할머니 집에 가 자야 돼. 그는 그래야 될 운명이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시 빼달라는 요구는 전혀 먹혀들지가 않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을 꼭 해야만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일부로 이스라엘 백성을 고생시켜야지만 하나님 다운 것입니까? 창세기 15:13-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내용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필히 애굽이라는 나라에 가서 고생을 해야만 하고 , 1대도 아닌, 2대도 아닌, 3대도 아닌, 꼭 4대가 되어야 비로소 그 이방 나라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희안한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그냥 아브라함 자손으로 하여금 그 어느 민족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약속의 내용만을 역사 속에 펼치는 것이지, 결코 아브라함 자손의 사정을 들어주는 것이 주관심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될 자의 개인적인 희망 사항들은 전혀 하나님의 약속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약속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의 약속에는 어둡고 자기 사정에는 밝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 보따리 속에는 죄라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심은 이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받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에 대해서나 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순전히 자신들의 사정과 연관시키는 것에서 그 속마음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따로 관리하시게 됩니다.
즉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한 작업에 나서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하면 죄가 죄로 드러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4:28-29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성령으로 따라 난 자가 꼭 육체로 따라 난 자로부터 핍박을 받아야만 합니까? 핍박을 안받고 따로 관리해서 조용하게 지내다가 천국가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지고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하지만 마냥 모르고 있도록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수시로 자기 백성을 그 세상 가운데 심어놓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서 자기네들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핍박을 하게 만드는 거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보인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된 복음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몹시 귀에 거스리기에 사정두지 않고 핍박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로서 세상의 정체는 탄로 났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냥 자기 백성이 핍박의 대상이 되도록 그냥 방치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들을 건져 내십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세상의 죄가 제대로 숙성하고 관영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문제입니다.
여기서 소위 하나님이 백성들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성도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발과 원망과 아쉬움과 실망감도 연이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이 백성들이 그동안 몰래 품고 있었던 죄악 덩어리들입니다.
그들도 자기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핍박 받는 것을 즐기고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백성은 자신의 괴로움을 구원의 하나님에게 호소하게 마련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1:19-20절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 이루기가 지금도 제대로 성취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코 실패라든지, 실수라든지, 저지당함이 도무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기 기준을 가지고 불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나 이스라엘 양쪽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가지고 다가오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감히 성취될 내용인지 짐작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죄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로서 우리 성도들은 인생을 살면서, 걱정이나 근심이나 염려할 자격이 아예 없습니다.
만약에 염려 걱정을 한다는 것은 곧 자기 것, 곧 자기 사정이나 하나님 앞에 늘어놓고 떼를 쓰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땅이란, 결코 인간의 반항이나 항변이나 원망 같은 것들이 일체 나타나지 않아야 될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예'가 된다는 이 사실에 입각해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죄인 노릇을 해 왔는지를 절실하게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도 받으니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질없이 자기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치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