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5:19-23/참 하나님
출애굽기 5:19-23/참 하나님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참 하나님
2003년 11월 9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5:19-23
5:19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줄 알고
5: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것을 만나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5:23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이용하라고 부름받은 자들이 아니라 자기 것까지 몽땅 하나님께서 헌신하라고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헌신이 안되면, 하나님이란 기껏 자기의 사유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것은 명백히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을 다들 진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스스로 가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위인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15: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겁니다.
순종이란, 우리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가 강하고,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잘 보여서 좋은 인상을 남기므로서 하나님 손에 갖고 계신 좋은 빼내어 자기 소유로 전환하겠다는 의도가 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지 결코 제사가 아닙니다. 아까 기도하신 분이 기도하시는 내용 중에, 하나님은 '상한 심령'으로 오셨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왜 '상한 심령'으로 오신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마음 속에 이미 100% 가짜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신께서 스스로 나타나주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지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나타나실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만 나타나십니다. 즉 '상한 심령'의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으로 자신을 나타내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그 이유는 충분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자기 딴에 순수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해 왔었습니다. 오직 애굽인들과는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학대와 핍박을 받고 있기에 이차에 하나님께서 나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완화시켜 주셔도 하등 이상한 것이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될 일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하나님쪽에서 누군가 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자신이 받은 계획을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주었을 때만해도 분위기가 괜찮았습니다. 더구나 모세와 아론이 직접 바로왕을 만났다고 하니 뭔가 큰 성과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바로왕의 기세가 한 풀 꺾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도리어 사태가 더욱 악화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니,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생활을 같이 하는 집안 식구들에게 미움받은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란 떡이나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용돈을 많이 주고 관심을 가져다 주어도 한 순간에 미움을 줘버리면 가출할 마음까지 드는 것이 인간이요 더 나아가서 자살하고 픈 심정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아니 히브리인들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그들은 전보다 더욱 바로왕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혹 떼려다 혹 붙힌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사태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약자인 자기 자신에게는 별 문제될 것이 없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도 안되는 소리고, 남은 것은 하나님 편에서 왔다는 모세와 아론의 잘못으로 돌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하시고 제대로 징계를 내려 교정시켜 달라"고 기도를 올리게 된 것입니다. 과연 이 히브리인들에게 문제가 없을까요? 예배 전에 우리가 같이 불렀던 복음 성가 가운데 443장에 이런 가사를 실려 있습니다.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소망없는 나그네의 길
방황하고 헤메이며 정처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위로 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짐 등에 지고 쉴곳 업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탕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우리가 이 가사를 대하게 되면, 마치 노숙자나 아니면 도박하다 구치소에 갇힌 방탕자 같은 분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과거의 신세 한탄을 기초로 한 신앙고백을 늘어 놓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한맺힘'의 발로입니다. 이런 '한 맺힘'을 안고 있는 한 그 어떤 경우에도 복음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찬송가 102장의 가사를 제가 적어 읽어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단순히 '주 예수님이 최고다'라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 고백이 제대로입니다. 과거에 망쳐 버린 자기 인생이나 현재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부르면 그것은 백발백중 엉터리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고통이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되었을 때, 분명 그동안 다른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는 것이 다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 일행이나 이 모세 일행을 욕하는 히브리인들이나 모두 참된 하나님이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사도행전 9:5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 당시 누구보다도 하나님 섬기는데 있어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 뿐만아니라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느냐 하는 점까지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 길로 내려가다가 벼락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고백이 이것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 전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던 모든 것이 100% 몽땅 거짓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그때사 비로소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물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제대로 하나님을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은 고린도전후서를 비롯해서, 로마서,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등등의 편지로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이런 편지들을 대할 때면 그 심정은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돌아가 있어야 합니다. 즉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자신의 한 맺힘이나 이용하고자 여겼던 하나님은 그 자체가 거짓된 하나님이다는 고백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글들을 읽어주셔야 합니다.
이와같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니 선지자 이사야가 나옵니다. 그는 평소처첨 아무런 생각없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인 주제에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군요"라고 말입니다.
사람이란 남들하고 비교할 때는 항상 자신의 장점이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 어느 인간이든 자신이 극도로 심각한 죄인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누가 갈꼬?"했을 때 이사야가 두 말없이 자신이 가겠다고 나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고 하시기를,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말씀으로 도리어 배척을 당한다"는 사실을 함께 일깨어 주십니다.
그러나 이사야에게는 그게 문제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옳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데 어딘데요? 최고의 측복을 받은 겁니다. 이사야의 이런 외침은 곧 이어 비난과 미움과 핍박으로 돌아오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을 미워하는 히브리인들처럼 말입니다. 이 와중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상한 심령'이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잘못된 하나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義)'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는 반드시 그 '자기 의' 사수를 도리어 공격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십니다. 인간은 자기 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적이 되는 겁니다. 정 지킬 수 없다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려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義)'를 드리밀면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사람들은 극구 예수님의 의를 짓밟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예수님은 '상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0: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참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도 바울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오늘날 우릴 비록 기적적으로 자연 현상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없다 할지라도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 모르고서는 이사야처럼 하나님에게 헌신 할 수 있는 친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자신의 한맺힘에 입각해서 하나님을 알던 것을 용서해 주시고, 죄인됨에서 부터 새로 시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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