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18-22/구원에 임하는 자세
구원에 임하는 자세2003년 9월 14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18-22
3: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3:19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3:20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3: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찌라 너희가 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인간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히브리인들이 아예 애굽에 내려가지 않고 처음부터 애굽의 압제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순전히 인간들 생각입니다.
새우를 튀김할 때에는 생새우에다 그냥 기름을 붓는 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펄펄 끊는 솥 안으로 새우가 들어갔다 나와야 그것이 새우튀김입니다. 새우 좋아라고 새우 튀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우의 주인 입맛에 좋아라고 새우튀김하는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는 히브리인들로서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스라엘로 탄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볼 일이 있으십니다. 자기 백성을 데리고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진정한 인류의 적을 확실하게 폭로하시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일 것입니다. 이상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 중심의 구원관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겁니다. 히브리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 같으면 능력 많으신 신께서 그들 히브리인들 만큼은 몰래 밤 중에 빼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예 자신들이 나간다고 바로왕에게 광고하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이야기입니까? 무소부재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바로왕 앞에 가서, "우리 히브리인들 이제 나갑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은 상대방의 권위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 진노를 불러이르키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요?
또 나가면 곱게 나가지 왜 애굽왕에게 허락을 얻어내어서 나가겠다고 시도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히브리인들을 학대하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는 악독한 왕에게 허락을 얻어 내겠다는 것이 과연 가당한 일일까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히브리인들을 탈출시키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모두 히브리인들의 의식구조를 알기 때문에 내린 조처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은 잊어버리고 단순히 지금 주어진 고통만 해소된다면 악마에게도 복종할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고통 당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창피스럽고 부화가 치미는 일입니다. 누구라도 항의하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사람을 건져내봤자, 그 구원자에게 감사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고통이라는 피해를 준 신이 원래 상태로 자신을 그 고통에서 끄집어 내어 주는 것은 지극한 마땅한 일을 했을 뿐이지 거기서 여분의 감사가 나올 여지가 없습니다.
고통을 준 당사자가 책임져야 될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인 자기들이 새삼스럽게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히브리인이나 애굽이나 모두 한 통속으로 보고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을 짓을 하면서 사는 인간들로 보고 있습니다.
단 히브리인들은, 왜 우리가 심판받아야 될 자인자를 알게 하실 자들이고, 애굽왕과 애굽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감추어지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권력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 인간들은 선과 의로움 보다는 영웅을 원하고 있습니다. 선이되었던 악이 되었던 영웅만 된다면 모든 것을 용납해주려고 합니다. 영웅이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입니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바둑 잘 두면 영웅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는 문제거리가 안됩니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노래 잘 부르는 자가 영웅이 됩니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사생활은 문제거리가 안됩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이 되었던 악이 되었던 나라만 선진국 되게 하면 그 대통령은 국민의 영웅이요 우상이 됩니다.
영웅의 존재는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 대리만족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기 집안 사람이 죽어도 안 울던 사람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는 웁니다. 비록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해 끼니를 넘겨도 김일성 주석이 죽을 때에는 온 북한 나라가 슬피 울었습니다. 사람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웅의 힘으로, 영웅을 기다리는 소망의 힘으로 삽니다.
무슨 일이든 잘 안되면 영웅이 등장해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고대합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찾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돈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돈만 조금 보태주시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돈없기에 신앙생활을 못하는 사람은 돈이 여유있게 있어도 신앙생활 안할 사람입니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에게 너무나 힘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힘을 가진 세력을 동경하고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세력을 가진 자에게 잘 보여서 그 분이 가진 힘 덕분에 자신이 덜 고통스러운 가운데 생존할 수 있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동경의 대상인 바로왕에서 나아가서, "이제부터 당신과는 결별이요. 우리는 이제 다른 신을 섬기기로 했소. 더 이상 당신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전쟁을 하자는 선전 포고에 해당될 일입니다.
그렇지않아도 바로왕의 성질을 건드릴까봐 노심초사 매사에 조심스럽게 움츠리고 사는데 거기에다 그런 요청을 하고 허락을 얻기를 원하는 것은 불 난데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도 봐도 애굽왕이 '허락치 않는다'는다고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허락지 않을 줄 뻔히 아심에도 불구하고 히브인들을 그 앞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원초적 세력이 그동안 애굽 나라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악한 세력을 확실하게 들추어 내어서 단호하게 심판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드는 원초적 힘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서시는 겁니다. 그리고 언약에 의해 탄생된 히브리인들은 이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뽑힌 겁니다.
오늘 본문 19-20절에 보면,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을 치시겠다고 작정하고 나서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작업은 하나님의 심판 작업과 병행해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심판받을 자를 가지고 억지로 구원시키려고 시도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겠다는 대상을 인간이 도중에 나서서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시면 아니되옵나이다.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하고 주제넘게 끼어드는 격이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생을 한다는 것은 자랑거리도 아니요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당연한 운명이요 팔자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생각하기를, 원래 나는 안 아파야하고, 원래 나는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분명 그 내부에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드는 세력이 들어앉아 있기에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들이 터잡고 있는 그 밑바닥의 세계를 들추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피조성으로 볼 때 마땅히 창조주의 말씀만 듣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선악과 과실을 따먹을 때부터 이미 인간들은 따로 노는 존재로 달라져 있습니다.
이 인간들이 따로 놀게 되면 순전히 영웅을 우상시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인들에게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은 히브리인들에게 낯선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도 역시 영웅을 고대하고 숭배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심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작업은 바로 이러한 숨겨진 내막들을 속속들이 노출시키는 과정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더욱 더 고생시켜,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불신자에 대해서 진저리칠 정도로 싫어지도록 하십니다. 그 대신 우리의 생명책을 더욱 더 사랑하게 하시고, 땅의 것보다 위에 것을 사모하게 하시고, 보이지 않는 소망을 두고 살게 합니다.
성도는 영적 군사입니다. 그리고 이 군대는 자기 힘으로 된 게 아님을 압니다. 로마서 9:16-18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 강퍅케 하는 편에 소속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편에 속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 긍휼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위치와 사명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파는 일에 열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창조주에게 다시 관심두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