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1-5/거룩한 곳
출애굽기 3:1-5/거룩한 곳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거룩한 곳
2003년 8월 24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1-5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사람이란 예수믿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알 뿐입니다. 만약에 예수 믿고 자신이 변한다고 여기면 그 때부터 자신이 달라 졌을 것이라고 여기는 증거물을 차곡차곡 기억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깊숙한 내면의 창고에 감추어 둘 것이 뻔합니다. 즉 날이 갈수록 점점 위선자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죄인에서 태어났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즉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상을 바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저는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갯벌을 보려면 밀물이 밀려나 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온통 바닷물이 덮쳐있으면 갯벌의 구조나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싶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밀물로서 우리의 전부를 덮고 있었습니다. 은혜가 덮었다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죄악됨은 그 은혜가 거두어질 때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했느냐고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은혜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평소에 그 은혜를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는 것 보다 하나님 앞에 더 건방진 것은 없습니다.
당연히 바다라고 여기는 곳도 나중에 썰물 때 가면 그동안 감추어진 온갖 것들이 갯벌에 가득 깔려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악의 바다입니다. 전부다 죄입니다. 그것이 고요한 은혜로 감싸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은혜의 관점에서 보기를 원하십니다. 은혜가 어떤 식으로 죄를 덮고 있는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의 죄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의 다가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먼저 모세에게 다가섭니다. 이러한 접근 창세기 3장에서 아담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반복입니다. 그 때 아담 부부나 오늘 본문의 모세나 둘 다 하나님의 실체을 접하고서는 너무너무 큰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너무 큰 두려움으로 납작 엎드렸습니다. 마치 죽은 자처럼 말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도 이처럼 하나님의 현전을 크게 느끼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에서 겪는 온갖 돈 걱정, 건강 문제, 가정 걱정, 미래 걱정도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참으로 무의미한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정작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과 지시를 받았는가 하는 점 뿐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명과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이러이러한 사명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는 그 사명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명조차 인간들은 조작해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사명은 자신의 죄인됨을 감추려하지 않는 반면에, 가짜 사명은 그 사명으로 자신의 죄인됨을 감추려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주의 종을 빙자한 가짜 설교자들의 본질입니다. 교회나 목회나 인간편에서 봐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편에서 볼 때만 중요한 일입니다.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게 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그 전에 학수고대한 것도 아닙니다. 일부로 초청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편에서 알아서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만큼 모세에게 맡길 일이 모세쪽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이나 할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모세를 만난 것은 모세의 앞으로의 역할이 이 떨기나무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즉 이 떨기나무에 분명히 불은 붙었으나 그 불이 계속 꺼지지도 않고 또한 손상이 가지 않았는데 이는 모세가 받은 사명이 하나님이 주신 불같은 능력이라서 아무리 일을 해도 모세에게 손상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마치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처럼과 같아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교회를 위하여 지상충성을 하셔야 하는데 그래도 조금도 피곤할 줄 모르는 대단한 초인적인 능력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와같은 설교를 하게 되면 교인들은 스스로 자신이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자신이 받은 신의 능력이 얼마나 끈질긴지 시험하려 들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부서지도록 교회에 충성해 볼 것입니다. 이 시대와 자기 교회에서 위대한 모세가 되어보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의 대표적인 양상입니다. 영웅주의입니다. 이 영웅주의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앙을 측정하려 듭니다. 이런 일은 악마가 인간을 가지고 노는데 주로 적용시키는 악마의 주특기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악마에게 시험을 받게 되는데 그 시험 중의 하나가 '초인적인 능력자 되기'에 집중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혼자서 해내십니다. 우리들은 아무 것도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불로서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가감없이 드러낸 겁니다. 신명기 4:34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거룩되지 못한 것은 소멸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모세가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해서 하나님의 일이 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받고 싶어 환장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자신에게 능력이 없이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못살려내고 있다고 한참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모세는 완전히 내몰라라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는 모세를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도 아니요, 위대한 모세를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하지 않는 모세를 위대하지 않게 사용하시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능력받아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떠나지 않겠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모세를 떠나지 않으시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 입장에서는 큰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수 받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긴장되고 황공스러울 뿐입니다. 모세 자신이 가진 능력이 다른 인간들의 능력보다 더 세기 때문에 우쭐댈 그런 여유조차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모세라도 여차하면 본인도 죽을 판입니다.
출애굽기 4:24에 보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어느 한 순간이라도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죽을 수도 있는 대상으로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에게는 더 이상 인간이나 세상이 두려울 리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의 불신앙과 인간적인 사고방식이 귀찮고 성가실 뿐입니다.
모세는 지금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든 근거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입니다. 6절에 보면,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린 언약은 필히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중의 무산될 성질의 약속이 아닙니다. 물론 모세 입장에서 "하필이면 저입니까?"라고 묻고 싶겠지만, 아브라함 자손 전부가 하나님의 일 담당해야 될 종들입니다.
따라서 종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일이 덮치지 않기를 원할 그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구경기에 선수가 공이 자기에게 안와야 한다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할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 3:5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 출애굽기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먼저 번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를 찾아왔다고 했는데 히브리서는 과거의 약속이 아니라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해 모세는 일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라는 것은 모세를 중간 다리로 사용하여 장차 오신 예수님에게 와서 완성을 꽃을 피운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받은 모든 사명은 단순히 모세의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하는 일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떤 일을 이 땅에서 하게 되느냐를 미리 보여주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과연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아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일어난 일, 즉 죄인을 은혜로 불러서 축복을 그 일을 모세가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부르심이 단순히 우리 구원만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숭고한 직책임을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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