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6-25 /추방당한 모세
추방당한 모세2003년 8월 17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2:16-25
2: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2:18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2:19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2:20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2: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2: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2: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2: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한 분들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가 알아야 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제쳐두고 꼭 모세라는 사람을 알아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라는 분은 우리 한민족도 아니요, 그리고 현재 사람이 아니라 먼 과거의 사람인데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알아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요, 모세는 기준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한다고해서 모세 자체가 위대하다고 여기면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극대화 하기 위해 모세가 동원될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모세 인생을 통해서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나는 겁니까? '모세'라는 말 자체가 물에서 건져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속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만큼 모세는 죽음 속에서 출현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인간들은 생명에서 삶으로 바로 이어지지만 모세의 인생은 죽음에서 이어져나오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내용일까요? 모세의 여정이 그 죽음의 세력을 말해주게 됩니다.
죽음이란 단순히 목에 붙어있는 숨이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인간은 어떤 식으로 자기 인생을 꾸려나가느냐를 가지고 설명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부터 인간들은 새로운 다른 관계를 맺어가게 됩니다.
인간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항상, "이번 일을 성공할까?"부터 먼저 고려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성공이라는 기준은 어디서 가져올까요? 하나님에게 가져올까요? 절대로 그렇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이기에 기존에 있는 인간 정신에서 가져오게 됩니다.
모세의 정신은 순전히 애굽 사람들의 정신입니다. 그에게 있어 '새로움'란 없었습니다. 기존에 있는 애굽의 막강한 정치 세력에서 얻을 수 있을 만큼 힘을 구축하는 것이 모세의 자기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즉 자기 민족이 이 애굽나라에 얼마나 자기 몫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신경쓸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일마저 대실패로 끝나고 모세는 자기 민족으로부터도 따돌림 받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정치 세력으로부터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를 출생케 한 힘은 이제 모세로 하여금 쫓기게 만든 운명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힘입니다.
다른 사고방식을 선택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미 있는 힘의 판도에서 그저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했다가 보기 좋게 밀려버린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이제와서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자기 딴에 새로운 인생살이를 시작합니다.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방종교인의 가정과 결혼하게 됩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출생해서 지금까지 애굽인의 도움을 받았고 이제부터는 미디안이라는 이방종교인의 도움을 받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성도가 절에 들어가서 스님의 돌보심을 받고 사는 식이 됩니다. 자 모세의 운명은 이것으로 끝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잠시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의 기준이 과연 진리인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서 5:10-13절에 보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심방을 하면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심방을 받는 분의 본래의 취지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흔히 심방을 받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나 평신도는 평소에 하나님의 뜻도 잘 모르고, 성경 말씀도 잘 몰라서 하늘에 계신 신의 심기를 건드려서 제대로 된 기도 한 번 못해서 남들처럼 복을 따내지를 못했다. 누군가 나의 이 실력없음을 좀 도와주면 좋겠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계시지 아니한가. 그분은 기도도 유창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해서 해박하니 우리 가정에 친히 방문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면, 그 목사님의 기도 덕분에 우리 가정의 어려운 문제점을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가 심방할 때마다 교인들이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결코 그들의 야망을 부추겨주는 심방 설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전할 수 있는 바는 듣든지 아니듣든지 하나님의 말씀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들에게 '새로움'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모세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원래 '새로움'이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모세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결혼 생활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대했던 '새로움'일까요? 아닙니다. 모세는 분명히 구사일생으로 인생을 출발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새로움이란 이런 죽음마저 초월하는 그 '새로움'이라야 하는 겁니다.
결혼이 과연 인간성까지 변하게 할까요? 물론 결혼이란 새로운 가정이 창조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소하고 신기하고 놀랍고 기쁘기만 합니다. 새로운 경험이겠지요. 문제는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지 그 속에 있는 인간 자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모세가 민족적 해방감에 충만해서 독립지사 노릇을 할 때, 그는 그 속에서 나름대로 진리를 규정하려고 했을 것이요, 참된 새로움이 뭔가를 탐구하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총각 때의 그런 작업은 모조리 압수 당했습니다.
이제는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되었습니다. 과연 총각 시절 때와 새 신랑 시절 중에서 어느 시절의 모세가 참된 모세의 본질입니까? 둘 다입니다. 세상 일에 열중할 때나 가정을 꾸미고 조용히 살 때는 모세에게 있어 달라진 점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양쪽 다 모세의 본모습입니다. 그리고 둘 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이 얼마나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보통 인간인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십니다. 즉 모세조차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서지 아니하면 오십보 백보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이 아닙니다.
그런다고해서 요란하고 화려하고 찬란한 인생을 산다고해서 결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재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어떤 자세로 삶을 영위하든지 간에 자꾸만 그것을 뒤엎는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뒤엎어진 인생이라고해서 그것 또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전은 앞면이나 뒷면이나 모두 같은 동전일 뿐입니다. 앞에서 뒷면으로 뒤집었다고 동전 아닌 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거기에서 거기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객이 되어 평범한 목부로서 살았다고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대기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그 객, 즉 나그네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원래의 자리란 애굽도 아니요 광야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의 자리는 물입니다.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죽음 속에서 태어난 자이고 건져냄을 당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를 가든 그는 나그네일 따름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 목숨조차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잉태하고 죄속에 잉태되었기에 당연한 결과로서 죽음의 세력은 우리 곁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장소나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천국은 이 땅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바로의 세력에 이해서 비호받고 자라났고 이제 장년이 되어서는 미디안이라는 이방 민족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 과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축복으로 약속하신 그 후손을 이처럼 내팽개치실 겁니까? 레위지파가 받았던 하나님의 축복은 휴지조각이 되는 겁니까?
축복의 후손이라면서 얻게 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는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23-25절에 보면, "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한 모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잡아 놓은 바를 위한 모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이끌어오심이요 살림입니다. 이 관계성이 바로 진리와 영생입니다. 모세는 이미 구원받고 일을 시작하는 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혼자서 자신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실패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이 성공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시면 어떤 경우나 상황에 있든지 그것이 곧 성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하루에도 수백번도 더 계획짜고 공상도 해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따로 있을 줄 압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가진 힘을 숭상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