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10 /모세의 출생
출애굽기 2:1-10 /모세의 출생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모세의 출생
2003년 8월 3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2:1-10
2:1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2: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2: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2: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2: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2:6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2:7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2: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2: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2: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기적에는 기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기적은 그 원류에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자... 십자가의 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곧 죽음에서 부활입니다. 즉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 기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죽음과 실패가 없는 기적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기적이 아닙니다. 참된 기적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의 속성을 담아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분명 인간의 힘으로 살 수 없었던 자입니다. 애굽의 권력에 의해서 살해당 할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살아났습니다. 기적입니다. 따라서 이 기적 안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정신이 살아있습니다.
흔히 사람이 남들 보기에 실패했다고 간주한는 사태가 벌어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태한 마리아를 보세요. 우리가 멀리서 볼 때는, 그녀가 참으로 장한 일을 한다고 격려를 하겠습니다만, 실제로 기적의 한 가운데 와 있는 그녀는 창피스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는 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무엘을 낳은 한나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여러분, 간곡한 기도도 없이 그저 술술 아들을 낳고 싶습니까 아니면 한나처럼 간곡히 아들 겨우 하나 얻기를 원합니까? " 아마 한나처럼 자식 낳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골병들 것 같아서 말이지요.
이처럼 남의 기적을 멀리서 보면 신나고 멋있어 보이겠지만, 그 기적이 벌어지는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남들로부터 인생 망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얼마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실망스러워 할까요? 그런데 구원이란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세에게 일어난 기적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게 되어서 그 결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뿐만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예수님의 손이 부끄럽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출생부터 참으로 실패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는 한 분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의 모세입니다. 우선 모세는 그 당시 분명 죽어야 될 신생아입니다. 뿐만아니라 모세의 생모는 결국은 모세 키우기를 포기합니다.
기적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인간이 그동안 추진해 온 일에 꼬리를 계속 이어붙이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기초를 닦아 두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수월하게 그 일을 이어받아 마무리 짓는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미완성적인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일을 완성시켜서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들로 하여금 맥이 빠지만 절망케 하고 힘이 빠지게 합니다. 그것은 곧 그 인간의 실패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십자가 속에 들어간 셈입니다. 과연 인간이 손을 떼어도 하나님의 일이 성사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서 4:26를 봅시다. "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참으로 난해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성취하려는 그 목표점입니다. 즉 자유를 주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현재 히브리인들은 이 목표점을 달성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모세라는 아들 하나를 몰래 키우는 것도 석달이 한계였습니다.
모세는 물론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란 야곱이 축복한 12지파 중의 하나 지파입니다. 따라서 레위지파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레위지파의 아들이 악한 애굽의 세력에 의해서 무산될 판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의 공격받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기적을 베풀되 우선 인간의 모든 힘을 끊어버립니다. 모세의 운명은 생모의 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모세를 누가 키운단 말입니까? 갈라디아서 4:26에 보면. '위에 있는 우리 어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자... 바로의 딸은 강에 떠내려온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일방적으로 자기가 짓습니다. 이 아기가 누구의 아이이든 상관없은 자신의 '물에서 건져낸 아이'라는 것입니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불쌍히 여겨서 건져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생모인 레위지파의 여인은 모세의 운명에 전혀 관여하지 못합니다.
이로서 모세의 운명을 놓고 바로의 권세와 레위지파에게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권세가 상호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싸움에서 뒤로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호하느냐 아니면 바로의 권세가 모세를 보호하느냐의 싸움으로 정리되었습니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날 때부터 원치않는 권력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권력은 히브리민족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민족을 말살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결과적으로 히브리민족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뜻을 무효화하려는 짓입니다.
이것은 곧 권력과 권력의 싸움입니다. 모세는 일종의 애굽 권력의 볼모가 된 셈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힘은 세상적으로 볼 때 참으로 권력자답지 않는 낯선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즉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성공여부가 완전하게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로 하여금 어린 자기 아기를 포기하게 만들게 한 상황도 이런 상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이와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될 것 같기에 믿는 것이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자기 시도입니다.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기'라는 또 하나의 힘을 사용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맡기십시오.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포기해도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구원은 더 이상 히브인들의 노고나 시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힘 사용은 이미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작용하는 그 힘으로 다른 히브리인들도 구원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히브리인들의 어머니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세라는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모세란 '물에서 건짐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토록 히브리인들을 괴롭혔던 애굽의 권력도 자기의 언약 백성을 건져내려는 하나님의 이용물이 될 뿐입니다.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듯이 모든 히브리인들도 물에서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애굽의 막강한 권력보다 모세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예수 믿기'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는 손을 떼야합니다. 하지만 모세와 같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탈출시킨 그 힘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실패하는 것이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죽음조차도 실패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기적에 하나님께서는 초청하십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국 다음과 같은 불신앙쪽으로 기우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한 줄 잘 아시지요. 하지만 저도 이제 지쳤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되는군요. 이제 이쯤해서 헤어지려고 합니다. 그동안 만남에 감사합니다."라고 등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하나님 제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지 아시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서 저로 하여금 그 힘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됨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나의 능력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의 증인이 되고자 합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이미 세상을 이긴 분입니다. 그 이기신 능력의 기적 안에 들어왔기에 실패가 곧 자유함의 증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나를 증거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세상보다 더 귀중한 분이 우리와 더불어 계심을 우리가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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