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15-22 /히브리인의 산파
히브리인의 산파2003년 7월 27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15-22
1: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1:16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1: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1:21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믿음에도 사기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준다고 마냥 좋아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믿음이 사기성 있는 믿음일까요? 그것은 이익을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결국에는 환란이 올 때 다 자빠지는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일까요? 환란이 오든 즐거움이 오든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 어떤 관련도 없다고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자기 몸에 병이 난 것도, 살아계신 하나님 믿는 것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지요. "하나님 믿는 당신에세 이러한 불행한 일이 덮쳤으니 당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라"는 등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환경을 이길 생각을 말기 바랍니다. 만약 자기가 가진 믿음으로 환란도 이긴다고 장담하다가는 더 큰 환란을 악마가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옛날 2차대전 때 유대인들은 게토라는 집단 이주 지역으로 쫓겨나 나치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때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왔던 자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원망하며 돌아서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작은 환란 정도는 자신이 그동안 키워온 믿음으로 감당한다고 장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손해가 온다고 여기면 걷어치우는 믿음은 사기성 있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18:3-8에 보면,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은, 뭐든지 떼쓰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떼를 쓰면 다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떼를 써봤자 믿음은 그것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떼 쓴 만큼 실적으로 기대하고 떼를 쓰지만 신앙인은 오직 이 땅에서 실적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의 오심을 고대하게 되는데 그런 믿음이 마지막 때에 과연 있겠느냐 하시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를 볼 때에 마치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한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원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갚아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 스스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남들로부터 피해를 보았고 혹은 출생시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태어나는 억울한 평생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생기는 원한과 분노를 예수님께서 다 갚아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자의 오심'을 믿고 그것을 믿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 라는 겁니다. 즉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별개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5:4-11에 보면,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과 불상사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을 당한 자를 구원코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말씀을 믿는 자만을 구원코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 '신자'가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심판주가 최후로 등장해야 하는가를 세상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불신자가 생각하는 억울한 일이란, 순전히 자기 의로움에 대한 기대했던 보상이나 결과가 없다고 불평하는 형식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편이 안 되어주느냐 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 억울한 일이란, 곧 심판주에 대한 인내만 증가시킬 뿐입니다. 믿음에는 하등 영향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다 오늘날 우리들의 형편을 대입시켜 보세요. 즉 '애굽 왕'이라는 자리에게, 부장님, 사장님, 목사님을 집어넣어보세요. 그렇게 보면, 오늘날도 우리의 신앙이 사기성이 아닌지를 시험해 오는 각가지 경우를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절대로, 자기 신앙의 힘으로 상대방을 감동시켜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소관입니다. 우선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 제직회 하면서 어떤 평신도가 대담하게 목사님에게 바른 소리를 했다고 합시다. 그 분은, 자신의 바른 소리에 목사가 감동받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란 진리먹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권위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나중에 자신이 교회 사택에 들어가서 통곡을 하든 말든 그 제직회 하는 현장에서는 본능적으로 권위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 평신도에게 보복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다른 평신도들도 실수했노라 하면서 꾸중할 것입니다. 사실 목사야 그 교회에 왔다 가면 그만이지만 평신도는 자신의 수십년간 십일조라는 목돈을 정기적으로 바쳐온 상태에서 그 교회에서 사랑받지 못하면 어디에서 사랑받겠습니까.
다시 생소한 교회에 가서 다시 새로 사랑 받을 짓을 할려고 하겠습니까? "아이구 실수했구나"라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기성 있는 신앙입니다. 그 평신도는 목사에게 그런 발언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물어봤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이야기를 해야합니까?"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하나님을 인간보다, 목사보다, 사장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은 저 멀리 계셔서 이 현장의 일에 무관심하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신경보다 그저 눈에 보이는 직분과 직분의 권력 다툼에 더 예민해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사기성 있는 신앙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권력자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식구가 불어난다는 겁니다. 히브리민족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출생부터 강제 진압에 나섭니다. 산파를 통해서 국가법으로 조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십브라라는 산파와 부아라는 산파는 그저 자기 식대로 히브리 아들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2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왜 여호와를 경외하고자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믿어서요? 자기 집이 오히려 더욱 왕성해 질 것을 내다봐서요? 히브리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서요? 바로 정권에 나쁜 감정이 있어서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환경이나 상황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이 결코 이 차에 신앙을 버릴거냐 유지할 것이냐를 갈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교회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오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와야 하는 곳입니다.
물론 같이 모여서 다음과 같이 단합대회 결의대회를 연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이여 이제부터 말을 맞춥시다. 혹시 애굽의 관리가 와서 왜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살려두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의 산모가 건강해서 산파가 손보기 전에 저절로 수월하게 출산했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하나님께서 속히 이 시련의 시절이 지나가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착한 일 한 번 해보겠다는 식으로 히브리인 아들을 살려둔 것이 아닙니다. 애굽 왕의 지시는 그 쪽 세계의 지시이고, 이쪽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뜻은 하나님의 지시가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그들이 그 후로 애굽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달라질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결코 억울한 일을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자의 억울함에 관해서만 심판주를 보내셔서 처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아주 간명하게 처리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고개 숙이고 삽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정도대로 흘러갈 줄 압니다. 비록 남들이 안 알아준다 할지라도 신자로서 살아가야 될 도리를 다 보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