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5:9-12 /구원을 기다림
구원을 기다림 2006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이사야 25:9-12 (사 25: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사 25:10)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의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사 25:11) 『그가 헤엄치는 자의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 교만과 그 손의 교활을 누르실 것이라』 (사 25:12) 『너의 성벽의 높은 보장을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구원과 더불어 반드시 심판도 병행해서 이루어집니다. 심판없이 그냥 구원만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의 경우, 빛 되시는 분이 나타나니, 어두움은 더 짙은 어두움으로 노출됩니다. 게다가 그 빛을 핍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에게 추가적으로 뭔가 더 보태주는 식이 아니라 마치 작대기 가지고 구정물을 휘휘 젖는 것처럼 깊이 숨어있는 우리의 더러운 심성까지 들추어내는 양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빛은 우리들의 평소의 심성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아품을 겪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얼마나 지독하게 고생을 했습니까. 그것도 자신의 천막사업 때문에 고생했습니까? 아닙니다. 다 그리스도 때문에 고생한 것입니다. 사람인 이상 누구나 심하게 고생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될 때 추상적으로 하늘에 계신 분에게 불만을 갖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평소의 삶을 태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하기는 커녕 도리어 wm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13:1-4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천국을 보았습니다. 천국을 보고 난 뒤 다시 세상을 보니, 그동안 심각한 일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하등 중요하지도 않는 하잖은 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마치 거인이 성큼성큼 산도 넘고 개울도 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마음은 온 지구를 다 덮어도 남을 만큼 큽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한 자 같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찮은 세상에 미련없습니다. 그는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사야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만들어서 우리에게 가져 다 주십니다. 도대체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베드로전서 1:10에 보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장차 오실 그 예수님의 영이 미리 구약 성도들 속에 들어와 계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성도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왜 고난 받아야 하며,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절대적인 영광을 누려야 하느냐를 말해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들어와 있는 겁니다. 마치 고래 사냥을 하는 어부가 작살로 고래 배를 정통으로 꽂아놓고서는 영차영차 배 쪽으로 조금씩 잡아당기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하고 부하 장군인 우리아를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제켜두고 나단 선지자를 유독 다윗에게 보내어 다윗왕을 꾸짖게 하십니다. 이 순간 다윗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다윗은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 제사나 예배나 막대한 예물을 바치기를 원하는 줄 았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그런 요구가 많다는 것을 누구나 명백하게 알게 됩니다. 하지만 실상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왜 너 같은 인간에게 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들 보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인간들에게 도리어 버림받는 모습으로 희생을 당한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해 주기 위함입니다. 즉 다윗으로 인해 아무 죄도 없는 우리아 장군이 죽게 됩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메시야가 사람들 앞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죄인도 도리어 자기가 밀었던 그 메시야의 용서와 사랑에 의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모든 선지자가 이런 식의 인생을 인도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압이라는 나라가 나옵니다. 이 나라가 광야에서 힘겹게 약속의 땅으로 이동 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몹시도 무시하고 못살게 굴었습니다. 심지어 발람이라는 선지자까지 공용해서 그 이스라엘을 저주토록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이란 악한 영에 의해서 핍박받는 양상으로 구원의 일을 하십니다. 모압이라는 나라가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주고 제압하려고 했지만, 아무 것도 없는 이스라엘은 이상스럽게도 자신이 가진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 계신다는 보이지 않는 왕의 이름을 부르는 식으로 버팁니다. 그 왕은 별처럼 이스라엘은 인도해오고 있었습니다. 그 왕은 자기 백성의 허물을 용서하는 식으로 적들로부터 보호해셨습니다. 인도하는 별, 이야기는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여행길과 관련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을 그저 구원을 가져다 줄 왕을 만나는데 있어 난데없이 등장한 별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다른 민족, 다른 사람들은 이런 스토리가 허구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 영이 있는 사람에게는 실제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 것에 일체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이 그리스도 영이 있는 사람도 주님의 이 십자가 사랑 외에는 관심없습니다. 성경을 보실 때 성경 중앙에 거대한 피라미드가 하나 세워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가 꽂혀있고 거기서 피를 흘러 아래쪽으로 연속적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말씀들, 구약 신약 할 것도 없이 많은 말씀이 있지만 그 모든 말씀에 피가 묻히기에 우리는 그 말씀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피의 은혜를 잊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피’ 산 교회의 특징입니다. 모압은 자신이 멸망 위기에서 헤엄치듯이 손들을 움직여보지만 하나님께서 이 어두움의 세계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멸망시키는 것과 병행해서 이미 자기 백성이 된 자들을 반드시 찾아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신분입니다. 참 사랑이 있으면 우리의 생명까지 주님께서 가져가셔도 감사할 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말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거래할 생각말고 그 피를 생각하면서 도로 우리의 가진 것이 다 빼앗기는 기쁨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