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4:17-23 /그 날에
그 날에 2006년 11월 8일 본문 말씀: 이사야 24:17-23 『땅의 거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였나니』 (사 24:18)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사 24:19)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사 24:20)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사 24:21)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 왕들을 벌하시리니』 (사 24:22)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사 24:23)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내뱉는 말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냥 이사야와 하나님만이 하시는 내용은 전달할 뿐입니다. 이사야의 이야기를 가지고 이 땅의 생활에 도움이 된다든지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사야 하는 이 이야기를 이해되려고 한다면, 자기 자신보다 더 귀중한 분이 있음을 반가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 자신들보다 더 소중한 분에 의해서 실행에 옮겨지는 내용이기에 만약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면 전혀 이 말씀 내용에 대해서 낯설고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그 날이 되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에게 심판이 감행되어 땅의 이곳이곳을 쑤시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해서 죄수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가두어놓는데, 당장 벌하지는 않고 몇 날 후에 벌하신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심판을 감행하신 주인공이신 하늘의 임금님께서 등장하시고 구원받은 자들은 그 임금님을 보좌한다는 내용입니다. 과연 제가 방금 소개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 어떤 분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찬동할 수 있을까요? 특히 땅의 이곳저곳을 쑤셔서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대목에서 박수갈채를 보낼 수 있습니까? 땅이란, 인간에게 있어 삶의 전부입니다. 태어난 곳도 땅이요 죽어도 땅에 흡수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생존이란 땅의 것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땅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땅을 뒤엎는다는 말씀은 곧 인간의 생활터전에 원천적으로 파괴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고도 인간의 생존이 가능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어 이처럼 근본적인 땅을 뒤엎는 심판을 감행하시는 것은, 땅만 바라보고 그것을 전부라 여긴 자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과연 이 세상의 인간치고 땅을 벗어나, 땅을 거부하고, 땅의 소산물을 먹지 않고서 살 수 있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할 때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살 때에는 땅에 자신의 노동력을 투자해서 그 투자된 노동의 생산물로서 살아가는 방식 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를 통과케 하시면서 그런 애굽의 삶의 방식을 청산하도록 하셨습니다. 즉 땅을 황무케 하여 더 이상 땅의 것에 뭘 기대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그 대신 하늘의 문이 열리내면 내리시는 만나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아무런 노동 한 것도 없이 살게 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접하게 됩니다. 이 광야 시절이 끝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겉으로 보면 애굽 생존 방식과 다를 바 없이 땅에 의존하는 것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 의존하는 방식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아무리 그 땅에다 노동에 쏟아 부어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압박하는 양상이 된다는 겁니다. 즉 땅이 도리어 그 위에서 사는 백성을 심판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광야 시절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하늘의 약속에 의존해야 만이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약속된 백성’임을 나타 내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땅을 뒤엎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껏 땅에서 사는 방식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을 모르기에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보지만 소용없습니다. 도망칠 재간이 없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광채를 접하고 난 뒤, 땅의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바위더러 자신들을 위에 덮쳐 어린 양의 심판의 빛에서 가리워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땅을 향한 심판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이런 심판을 실시하는 분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누구를 지독하게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보고 싶다’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힘든 인생을 보냈지만 그래서 믿음을 포기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 많고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지만 그 모든 구절을 압축시키면 나오는 것은 ‘사랑’입니다. 즉 ‘보고 싶다’입니다. 목자를 잃은 양이 그토록 목자가 보고 싶은 그 심정이 곧 사랑이며, 집을 나간 탕자가 그렇게 보고 싶은 아버지를 찾아 돌아와서 재회 하게 된 것도 다 ‘보고 싶음’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평온했던 것은 보고 싶었던 그 분이 저만큼 하늘에서 일어나 자신을 내려다 지켜보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두 사람이 잠을 자더라도 한 사람은 버려두고 다른 사람은 불림을 받는 것도 다 평소에 주님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버림을 받는 것도, 평소에 주님을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의 세계를 외형적으로 보면, 평소에 늘 주님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 전혀 차이 없이 섞여 지내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늘 푸른 나무는 겨울이 되어봐야 알듯이, 땅을 구석구석 뒤엎는 심판 날이 오게 되면, 주님을 그리워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과 낭패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감행된 심판은 하늘의 악의 무리들을 당장 영원한 처벌은 하지 않으시고 경찰서 유치장처럼 일시적으로 한 곳에 가두어놓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부려먹기 위해서입니다. 악마의 종들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복음’과 ‘다른 예수’를 증거 해야 될 일에 부지런히 종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을 다해 참된 복음을 아는 자들을 핍박을 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가라지 같은 인간과 참 알곡이 구분됩니다. 참된 알곡은,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미암아 비록 악마의 종들이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더라도 기쁜 얼굴로 주님 품으로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의 생명이 더 위력 있음을 고마움으로 받아드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모든 율법을 이룬 상태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