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3:1-2 /두로에 관한 경고
두로에 관한 경고
2006년 10월 18일 설교 본문: 이사야 23:1-2
(사 23:1)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니라』
(사 23: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거민들아 잠잠하라』
(사 23:3)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운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었도다』
(사 23:4)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보장이 말하기를 나는 구로하지 못하였으며 생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 남자들을 양육하지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니라
선지자들이 대자연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요즈음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인 안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대자연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있는 양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바다 보고 꾸짖는 것이나 혹은 무화과 나무를 직접 저주의 대상으로 간주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대자연이 직접 살아있다고는 말하기 곤란하지만, 선지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데 있어 대자연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여 전하신다는 점을 그는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직접 계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자연의 변화를 통해서도 자기 백성들이 눈치 채는 방식도 사용하는 겁니다.
결국 대자연의 그 어떤 변화라도, 선지자나 하나님의 백성의 입장에서 아무런 의미없이 쉽게 버려도 괜찮은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이방 민족의 멸망은 결코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 주어졌기에 생긴 사태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의 반응 속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두로 사람들은 해변가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생업은 무역업입니다. 무역이란 비록 바다와 육지의 운반에 있어 큰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한 번만 무사히 상품을 싣고 왔다하면 어지간한 실패에도 무너짐이 없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많은 나라 가운데서 가장 부유한 동네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돈과 두로의 부유함이 온 세상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이 점을 잘 아는 시돈과 두로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우월함을 과시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현실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현실관 정립은 먼저 기대하는 바가 설정되어있고 그 기대하는 바와 결과가 일치된다고 인정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현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사람들이 평소에 무엇을 기대하느냐를 찾아봐야 하는데 이는 평소에 사람들이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에 대만족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돈과 두로의 거민들이 이런 인간의 대만족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의 도시를 통해서 참다운 현실의 모델을 발견합니다. 현실성이 있는 소망이 아니라 소망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자신이 소망하고픈 것이 실제로 두로 지방에서 성사되고 있으니 두로와 시돈을 바라보는 자들은 그들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고픈 욕망을 감출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도 그러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현실에 의해 지배받습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예정’입니다. ‘창세 전에 이미 예정’ 되어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이 ‘창세 전 예정’의 내용을 따라서만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마치 개미 핥기의 긴 혓바닥처럼 쭉 뻗어 길게 내려와서 성도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빨아당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자신이 따로 장만해야 될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창세 전의 예정에서 뻗어 나온 팔자와 운명은 그 안에 ‘따로 나의 영역 만들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 만의 영역’을 부셔버리고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일을 벌려나가십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내 소유’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 소유’가 없다면 그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모든 것을 앗아가고 뺏아가버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도와 비성도간의 차이성을 또렷이 부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져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24-27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세는 다른 사람과 달리 특이한 면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애굽의 재산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는 것은 큰 재산으로 여기고 싱글벙글한다는 겁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에 그가 받은 ‘믿음’으로 인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기이한 삶의 태도를 나타내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모세와 동일한 삶의 태도를 나타내지 아니하면 모세가 받은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다. 동일하게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았다면 필히 모세가 보여준 그런 삶의 자세를 보이게 마련입니다.
둘째로는 모세는 보이는 권세자의 분노보다 보이지 않는 분을 따랐다는 겁니다. 이것도 참으로 납득되기 곤란한 기이한 현상입니다. 이 모든 것이 창세 전부터 예정되었기에 그 예정이 경과를 가지고 진행되면서 나타내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 전부터 구원받지 않기로 예정되어서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생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두로의 번영과 화려함을 기대했던 먼 무역상들이 왕창 무너져내린 두로 도시의 풍광을 대하면서 망연자실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고 기대했던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예언에 준해서 ‘낮 꿈’으로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겁니다. 언제 번영을 했느냐 하는 양으로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처음부터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는 것들을 선호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이기에 애굽의 보화나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권세자의 후원을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성도라면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서 기대할 수 없을 것을 고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해서 천국으로 빨려들어 가는 자만이 누리는 신바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빼앗겨버린 입장에서 현재 가진 모든 것이 넘치는 주님의 은총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