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0:1-3 /선지자의 고난
선지자의 고난
2006년 9월 27일 설교 본문: 이사야 20:1-3
[1]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결정할 사항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흔히들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성경상으로 보았을 때, 성도의 종착점은 이미 천국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목적지가 요지부동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어떤 경로를 밟아 죽던지간에 그 성도의 도착지점은 변동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 인생의 중간을 지나가는 코스 결정에 따른 고민과 걱정 같은 것은 다 부질없는 것이 됩니다. 어떤 경로를 밟든지 간에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고심해서 내릴 결정이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그 인간 본인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본인이 미처 알지 못하는 생소한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그 세계는 기존 세계에서 아무리 탐구해도 예상해 볼 수 없는 것들이 가득 찬 세계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요구하는대로 하나님께서는 들어 줄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전에는 도저히 생각해 볼 수 없는 것들을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괴로운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남의 이야기로만 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오늘날의 선지자들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그대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3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거리를 다니는 계시 행위는 참으로 혹독해 보이지만 이보다 더 혹독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 분은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 4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는 잠을 반듯하게 잘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190일 동안은 왼편으로 누워자 자야하고 그러고 난 뒤 40일 동안은 오른편으로 모로 누워자야 합니다.
190일이란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한 햇수, 즉 190년 동안 범죄했기에 1년을 하루로 계산하여 선지자가 대표적으로 그 징벌받는 시범을 보여야 하는 겁니다. 선지자들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해야합니다. 이사야가 3년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지내야 하는 이유는, 장차 이집트와 구스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포로잡혀 가는 광경을 미리 보여주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 행여 잠결에 모로 누워자는 원칙에서 이탈될까봐 하나님은 선지자의 몸에 쇠사슬로 고정시켜 놓고서, 거기에다 천한 음식과 더러운 인분으로 그 음식을 요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고생스러운 모양새는 장차 이스라엘이 당한 징벌을 조기에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시련이 그 선지자 당사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칙이 퍼부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지자가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선지자가 가는 길을 외롭습니다. 하지만 실은 모든 인간들이 다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홀로 가지 말아야 될 인생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대가족 속에서 성장하고, 군중 속에서 하루 종일 있어도 여전히 외톨이입니다. 배가 고플 때 그 어느 누구도 자기 대신 밥 먹어서 해결해 줄 자는 없습니다.
본인이 직접 숟가락 들고 음식물을 입에 털어넣지 않는 한 배고품이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살아가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인간의 본질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있는 방식은, 인간 집안 식구가 자기를 대신할 수 없는 그런 불가능한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참으로 우리 자신을 대신하실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외로운 것 가운데서 외롭지 않습니다. 어쨌든, 선지자의 생은,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선지자의 모습은, 인간의 가치가 인간 본인의 소유로 결정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흔히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헐한 요금의 기차를 타면 가치가 낮다고 여기고 고급 기차를 타면 본인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세요. 헐한 기차를 탄 그 본인이 고급 기차를 타고, 역시 그 인간이 그 인간입니다. 이것은 환경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몸무게가 줄었다고해서 가치가 줄어든 것도 아니요 덩치가 좀 크다고 가치가 더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지는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지금 선지자는 본인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현장에 서 있는 겁니다.
즉 이처럼 인생의 가치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곳에 있게 하신 말씀의 가치가 그 본인의 가치입니다. 이것은 성도란 주위 사람들의 평판이나 비웃음에 개의치 말하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위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산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있기에 그런 악마의 웃음에 좌절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로 선지자가 보여주는 것은, 비록 자신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적 유익을 얻는다는 점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힘들고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고해서 그것으로 가치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쟁기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겁니다.
소위 겸손이라는 미명하여 주의 말씀에 따르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나태하고 숨어버리고 모든 일을 거절하는 경향은 결코 선지자다운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훌륭함이나 위대함을 증거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남들이 그 사람으로 인해 여러 가지고 교훈을 받게 하기 위하여 그 사람을 세상 한복판에 세워 두신 것입니다.
흔히 기복기도라고 간주될까봐 미리 점검해서 아예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너무 심한 움추림입니다. 주님께서 그 기도를 통해서 남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남기려고 하는 시도일 수가 있습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라고 하나님께서 하실 때 “여기 제가 있나이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도착지점이 결정된 마당에서 더 이상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