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4:28-32 /블레셋의 파멸
이사야 14:28-32 /블레셋의 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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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의 파멸
2006년 7월 19일 설교 본문: 이사야 14:28-32
(사 14:28) 『아하스 왕의 죽던 해에 받은 경고라』
(사 14:29)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 열매는 나는 불뱀이 되리라』
(사 14:30) 『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빈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너의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너의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하리라』
(사 14:31) 『성문이여 슬피 울지어다 성읍이여 부르짖을지어다 너 블레셋이여 다 소멸되게 되었도다 대저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 그 항오를 떨어져 행하는 자 없느니라』
(사 14:32)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
유다 나라는 특수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정작 유다 나라 자신은 왜 자신이 특수한 나라인가에 대해서 인식이 모자랍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주위에 불신자들을 배치하므로서 상대적으로 성도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것을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유다 나라 근처에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배치하므로서 상대적으로 유다 나라의 특수성을 부각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사야 2:6에 보면,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블레셋을 ‘술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술객이란 여호와의 언약과 상관없이 세상과 현실을 판단내리고 움직이려고 실행에 옮기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민족을 이스라엘 나라 근처에 상주하면서 이스라엘과 관계 맺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다 나라 사람들은, 여호와의 언약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이방 민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토록 부러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가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자유분방함을 너무 부러워해서 그들과 같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의 참된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교인이 세상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신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이 알맹이처럼 자기 안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성도라면 사도 바울을 부러워해야 하고, 스데반 집사님을 부러워해야 하고, 거지 나사로를 부러워해야합니다.
봄이 되면 불신자들은 대문에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을 갖다 붙입니다. 올 봄부터 큰 행운이 우리 집에 밀어닥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바로 인간의 본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목사가 큰 교회를 부러워하는 것이나 교인들이 부자집을 부러워하면서 교회를 찾는 것이나 모두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것은 오로지 ‘입춘대길’입니다.
이들은 성도의 특수성을 스스로 차버리고 싫어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귀찮아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이스라엘 나라 근처에 있는 블레셋 나라로부터 이스라엘이 철저히 유린당하고 침략을 받고 지배를 받으면서도 도리어 늘 블레셋 나라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언약이라는 것이 없기에 인간이 품고 있는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습니다. 즉 ‘큰 힘을 가진 자가 진리요 승리요 최고다’라는 의식입니다. 사울왕 시대 때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군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의 기를 파랗게 질리게 하는 것도 블레셋 나라입니다.
사사 시대에 삼손이 등장했던 시절에도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블레셋 나라로부터 유린당했습니다. 아니, 도리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진해서 그 블레셋의 통치는 지당한 일로 간주할 지경입니다. 힘이 약하니 여호와 하나님가지고 뭘 하겠느냐 하는 식으로 힘 센 블레셋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태어나게 하셨는데 그 자가 바로 ‘삼손’입니다. 이 삼손의 평소 행동은 그 당시 지배받는 이스라엘 민족이나 지배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의식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힘이 곧 진리며 힘만 세면 최고다’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인물입니다.
더구나 삼손이라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여호와의 정신을 회복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개인감정을 발휘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힘은 있으되 진리는 여전히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감추어져 있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수한 힘들은, 삼손의 여자를 방해하는 경우에만 산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같은 사람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무진 노력했습니다. 즉 블레셋 입장에서는 ‘특수함’이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힘의 원천을 알아서 그것을 제거하므로서 삼손 조차 별 볼일 없는 인간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이 곧 그 힘을 가진 자기 자신을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것인 줄 알았던 삼손은, 힘없는 여인의 애정에 무력한 모습을 드러내므로서 힘의 소진과 더불어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로 함께 사라질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날 때부터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운명을 지닌 삼손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 만이 나타낼 수 있는 진리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힘 발휘’가 아니라 ‘희생자’를 통해서 진리가 비로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즉 희생이 힘보다 더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뿌리를 잘라버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족속들은 아무리 힘으로 우위를 가져도 결국 뿌리없는 허수아비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유다나라는 뿌리가 있게 됩니다. 그 뿌리는 삼손의 죽음처럼, 진리를 품고 희생하는 것으로 인하여 생겨난 언약 완성입니다.
이 언약에 충실하면 유다나라 주위에 있던 나라들도 그 언약 완성에 두려워하게 됩니다. 역대하 17:10-12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 사면 열국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 블레셋 중에서는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리며 은으로 공을 바쳤고 아라비아 사람도 짐승떼 곧 수양 칠천칠백과 수염소 칠천칠백을 드렸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했던 블레셋도 유다 나라가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면 도리어 강대국의 자격으로 덮치게 됩니다. 역대하 21:16-17에 보면,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그 무리가 올라와서 유다를 침노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뿌리없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그 뿌리가 되어 거기에서 자라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도가 이런 하나님을 스스로 버리면 하나님을 대체해서 뿌리없는 세상을 부러워하게 되고 지배받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허수아비 같은 세상 사람을 곁에 두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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