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0:15-19 /도끼 드는 자
이사야 10:15-19 /도끼 드는 자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도끼 드는 자
2006년 5월 10일 설교 본문: 이사야 10:15-19
(사 10: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사 10: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찐 자로 파리하게 하시며 그 영화의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사 10: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요 그 거룩한 자는 불꽃이라 하루 사이에 그의 형극과 질려가 소멸되며』
(사 10:18) 『그 삼림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인이 점점 쇠약하여감 같을 것이라』
(사 10:19)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했다고 여겼다가 실제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와 맞닥뜨렸을 때에는 ,도리어 그 메시야보고, 이단이니, 귀신들린 자니, 귀신의 왕이니 하는 비난을 쏟아내는 경우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신 메시야를, 하나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정작 못 알아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 뜻하고는 정반대로 이해해 버리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끼나 톱이나 막대기나 몽둥이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 사람들은 절대로 자랑하거나 크다고 여기거나 막대기를 쥐고 있는 분을 도로 들려고 하거나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호응할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하나하나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의 건축 장비들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포크레인을 운전하는 사람이 분명히 인간이거늘 만약에 포크레인이 자기 힘으로 땅을 파고 집을 무너뜨렸다고 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건설 장비가 우수하다고 할지라도 그냥 가만히 두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입니다. 만약에 포크레인도 인간 없이 자율성을 갖는다고 나선다면 이것은 신의 주권성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또 쉬운 예로 안경과 안경을 쓰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안경을 통해서 아는 것에 대해 안경은 그 어떠한 권한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경을 통해 알게 된 그 눈은 안경에 소속되는 기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경의 기능은 단지 보여 지는 기능이지 볼 수 있는 기능이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의 사건이란 인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발생되는 것입니다.
또 한 예를 들면, 컴퓨터에 관한 겁니다. 컴퓨터 자판기에 사람이 손가락으로 치는대로 화면에 글자가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고해서 결코 컴퓨터에게 그 예술의 가치를 돌리는 법은 없습니다. 방금 언급한 이 세가지 예, 포크레인과 안경과 컴퓨터는 그 어떤 수고를 했고 부림을 당했더라도 그 공적을 그 기계들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인간도 하나님에게 있어 이런 도구에 불과하니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이나 영광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의 존재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상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을 가지고 메시야를 맞이하면 구원에 탈락되는 법이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야기한대로 늘 겸손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당연히 메시야를 알아본다고 여겼던 그들이 막상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보고서는 이단이나, 귀신의 괴수니, 마귀들린 자라고 아낌없이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들의 성경해석이 항상 틀린 답을 내린다는데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지만 그것조차 메시야를 죽이는데 동기로 작용되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그것은 이 말씀의 온전한 달성자이신 예수님 본인 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교만하고, 자만하며, 자기자랑하며, 건방지게 하나님마저 마구 부리는 자로 등장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단순한 물체에 불과한 톱이나 도끼나 막대기나 몽둥이로 머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예를 들면,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에 천사가 와서 롯에게 하는 말이 곧 이 도성이 불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롯은 받아들였지만, 롯의 사위는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즉 인간은 단순한 컴퓨터가 아닙니다. 명령하면 명령하는대로 젖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왜곡해 버립니다. 그래서 롯의 사위는 농담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롯이 그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롯의 사위들보다 더 논리적이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러한 것입니다. 사도가 되기 이전의 사울이라는 사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잘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 자를 이단으로 간주해서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돌리는 일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령을 받고부터는 오히려 반대로 예수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행함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즉 믿음이란 자신의 판단이나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고 오로지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한 예로서 교회에 두 집사가 있다고 칩시다. 한 집사는, 목사님이 명령하면 그 명령대로 따르겠다는 타입이고, 다른 집사는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타입입니다. 어느 쪽이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당연히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예배당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목사가 말하기를, “창문 좀 닫아주세요”라고 명령하는 그 명령을 듣고 창문을 닫는 것과, 그렇지 않고 직접 찬바람이 피부에 느껴서 자발적으로 문을 닫는 쪽과 어느 쪽이 믿음이겠습니까? 당연히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쪽입니다.
이와같이 천국에서 불어오는 모든 말씀의 바람을 정말이지 마음의 피부로 늘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믿음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그 명령을 해석해서 자신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니 이런 사람은 반드시 큰 체하고, 막대기를 들려고 하고, 자기 자랑을 중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도 성령을 받지 않은채 태어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일방적인 성경 해석을 시도하게 됩니다. 즉 “이만하면 나도 구원받은 태가 나는 행위를 하고 있겠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십자가 앞에서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을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하듯이, 어찌하든지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즉 쉬지 않고 자기 행함을 부인하고 주님의 공로로만 돌리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 속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의 능력으로 성취되어 있습니다.
믿음에서 행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오로지 말씀 성취를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심에 대해 늘 감사하면서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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