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0:5-11 /몽둥이에 임할 분노
이사야 10:5-11 /몽둥이에 임할 분노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몽둥이에 임할 분노
2006년 5월 3일 설교 본문: 이사야 10:5-11
(사 10:5)『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사 10:6)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사 10: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사 10:8)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사 10: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사 10:10)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사 10:11)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하나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어디에 하나님의 흔적이 나타나는 겁니까? 교회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포착하기 위해 예민해져 있습니다. 흔히 간증집회에서 많이들 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 여기에 관한 것들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이런저런 시도를 했더니만 결국 하나님께서 과연 나에게 응답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주신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이 애써서 찾는 시도를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 성경으로 완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지금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부응하신다면 인간들이 내민 조건과 그 들어준 응답을 한 조로해서 요한계시록 22장 그 뒷장에 부록으로 계속 추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이러이러한 조건을 가지고 기도하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소원을 들어주십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뜻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염두에 둔 하나님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고 난 뒤, 지옥에 갔던 부자가 천국에 있던 아브라함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직 죽지 않고 있던 동생 다섯 명이 있는데 그들이 이곳 지옥에 오지 않도록 제발 거지 나사로를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되살아나게 해줄 수 없느냐?”라고 지옥 간 부자가 부탁합니다.
자기 아들이 개그맨으로 인기를 얻은 것도 요즈음 교회에서 간증집회 거리가 되는 마당에 참된 천국에 갔다가 다시 온 사람의 간증이라면 대박 터뜨리게 될 것이 뻔할 것이고, 동생들이 아마 크게 감동 받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의를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대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는 자라면 비록 죽은 나사로가 되살아나서 천국에 대해 이야기해도 믿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오로지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자신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사람의 기대치를 채워주기 위해 성경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그 분을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들이 아침에 곱창에 먹고 싶어서 어머니보고 곱창해달라고 합니다. “엄마, 곱창해 주시면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학교 갈 수 있는데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잡채를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오해하기를 “아, 어머니의 뜻은 곱창대신 잡채를 먹고 아침 든든하게 챙기라는 것이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합니다. “애야 그게 아니란다. 네가 배고픈 것은 나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잡채가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잡채는 왜 맛있으며, 네는 평생을 잡채의 영광과 이름을 빛내는 사람이 되어라고 잡채를 만들었다”라는 겁니다.
즉 아들은 자기 배고픈 것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어머니는 잡채라는 음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란 오직 성경에서 비로소 나타내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 피조물들이 있음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풀의 꽃같이 사그라지는 자기 자신보다 영원한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우를 보면, 이 앗수르라는 나라는 백전백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그렇게 되도록 사용하신 것 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나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몽둥이 역할하는 그 앗수르 라는 나라조차 마치 자신의 신이 다른 국가의 신보다 우세해서 이긴 줄로 압니다.
소위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이 앗수르 나라와 같은 태도로 세상을 대할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합니다. 그 예로서 열왕기하 10장에 나오는 예후라는 사람입니다. 이 왕은 아주 바알 종교에 대해 지독한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알 종교를 아예 몰살을 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의 전략은 이러합니다. 열왕기하 10:18-20에 보면, “예후가 뭇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계략대로 바알 종교에 종사하는 모든 자를 다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알 산당을 변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 이 정도했으면 우쭐댈 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10:28-31에 보면,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참으로 요상한 게 인간입니다. 누가봐도 하나님의 일에 충성했다고 자부한 그 사람조차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같은 편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일의 축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인간들이 일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이란 사실 예수님을 미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속셈이 소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할 때도 지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밉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법칙을 인위적인 능력으로 획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앗수르이며 예후이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흉내를 내면서 수 십년 교회를 다닙니다만. 그러나 그 내면에서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여전히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앗수르의 교만이 우리 자신들의 타고난 원질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영광을 꾀하기 위해 복수극에 나서는 짓, 바로 이 짓이 회개해야 될 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정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자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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