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0:1-4 /불의한 법령
불의한 법령
2006년 4월 26일 설교 본문: 이사야 10:1-4
(사 10:1)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사 10:2)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사 10:3) 『너희에게 벌하시는 날에와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
(사 10:4)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우리 사람이 사는 세상은 당연히 하나님의 법령에 의해서 포위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처음부터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 안에 갇혀 있는 꼴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요, 사태파악이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 나무를 먹고부터는 아예 하나님마저 무시하고 살고 싶은 본능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치 거센 황소 등에 카우보이들이 올라타며 미친 듯이 몸체를 흔들어 자기에게서 떼어놓으려는 로데오 경기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이나 감시나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합니다. 소위 법이나 원칙이라는 것을 떨치려고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런 사태파악이 되지 않아서 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잣대나 기준도 아예 없고 하나님마저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옥 들어가고 나면, “아, 이 세상은 나를 위한, 혹은 내 멋대로 노는 마당터가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9:27-28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는 전 세계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코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안주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일을 만들어오셨고 사건을 만들어내셨던 분이십니다. 특히 시내산 밑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까지 체결하신 분이었고, 직접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의 두 팔에는 하나님이 주신 돌판까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싫어하시면 안됩니다. 도리어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숨을 소비할 수 있는 소비처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고백은 우리의 목숨을 대신 바치고 행하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덜 귀한 가치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사기로 봅니다.
사람들이 불안하게 사는 이유는, 자기 목숨의 소비처를 찾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안절부절하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것도 자기 목숨도 아낌없이 바칠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일관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려왔을 때, 우리가 기뻐하고 편안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 목숨의 고수하기란 사실 의미없습니다.
그 여호와께서 무슨 뜻을 알리고 계십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운영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국가경영이란 능력 위주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을 키워주어서 더욱 더 능력을 발휘해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고루 혜택을 입게하는 법령이며, 능력없는 사람들은 도태시키는 법령입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철학적 토대는 존 로크의 노동가치설입니다. 노동가치설이란 무소유의 자연에다 노동을 가함으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는 이론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사람이 흙을 재료로 사용하여 도자기를 빗어, 시장에서 1만원의 가격을 붙여 팔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1만원의 가치를 어떻게 창출되었는가? 바로 노동에 있다는 이론이 노동가치설입니다. 노동은 몸의 활동이고, 몸은 당사자인 갑의 몸이기에 그 가치 역시 갑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노동가치설은 주장합니다. 그래서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노동의 결과물은 그 노동을 투여한 당사자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나 1만원의 경제적 가치를 좀더 면밀히 분석해 보면, 노동 외에도 다른 몇 가지 요소도 기여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흙, 물, 빛 등의 자연입니다. 흙이나 물 없이는 도자기가 만들어질 수 없다. 또 일을 할 수 있도록 심장이 계속 뛰도록 조치하신 분이 엄연히 계십니다. 심장은 자율신경이라서 우리가 힘 준다고 더 빨리 뛰고, 우리가 신경쓰지 않는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다. 심장을 주관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따로 계십니다.
그리고 도자기 굽는 기술을 알려준 은사가 있고, 지금까지 장성케 한 부모가 있고, 도자기를 만들 수 있도록 법이나 운반할 수 있게 하는 도로나 항만이나 쓰레기 처리장 같은 사회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사회간접 시설들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타인이 도움없이는 오늘날 우리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국가경영은 필히 노동력이 뒤떨어지는 자와 노동력이 우수한 사람끼리의 비교우열이 생겨버립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 점을 싫어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국가라면 그 국가의 원형은 바로 ‘애굽’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일반적인 애굽나라에 빠져나온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2:21-24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유다 나라 사람들은 이방나라와 자신의 나라와의 차이점을 여호와 하나님의 법 앞에서 발견해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랑하거나 뽐낼 수 없는 겁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개입하니 죄인이 의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하여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할까요?
사태파악을 못하고 지옥가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기 자신이 그들보다 위대해서 구원되지 않았음을 사랑으로 증거해야 하는 겁니다. 자신도 예수님의 복음을 몰랐더면 사태파악이 안되어서 신나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아찔한 존재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을 싫어한다고 해도, 복음 전도자 자신도 인간적인 면으로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음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잘난 맛에 살지 말고늘 십자가 앞에서 그 의미를 증거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