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8:19-22 /산자와 죽은 자
산자와 죽은 자
2006년 3월 15일 본문 말씀: 이사야 8:19-22
(사 8:19)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사 8: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사 8: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를 믿는 하나님을 저주한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에게는 자제할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독하게 답답하면 언제든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저주할 수도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진심까지 놓치지 않고 파내십니다.
사람이란 답답하면 무슨 짓이라도 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번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답답하다’는 말입니다. 이 답답증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는 종교라는 것이 융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 나라가 다른 나라 같으면 이 답답증은 쉽게 해결이 가능합니다. 종교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성직자들은 대중들의 답답증과 응어리진 것을 풀어내는 것을 업으로 삼기 위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라는 것은 아예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무엇에 한맺혀있는지 그것만 풀어줘버리면 됩니다. 이처럼 한 맺힘을 풀기 위한 각가지 수완들이 숙련된 기능인들의 전문 기술로서 자리잡게 됩니다. 이방 종교에 있어 유지책은 대중들의 호응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이란 인간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을 전문으로 합니다. 어떤 소원이든지 간절히 그 신에게 호소를 하게 되면 착하고 순한 심성을 지닌 신은 인간들의 애초로운 소망을 외면치 않고 응답하여 인간들이 응어리진 아픔을 시원해서 풀어주게 됩니다. 따라서 이방종교의 성직자들은, 늘 일반 교인들이 무엇에 아파하고 무엇에 슬퍼하는지를 제대로 살펴서 그 한을 풀어줄 수 있도록 기능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조직체 부흥의 관권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부흥되려면 될 수 있는대로 성경은 멀리해야만 합니다. 괜히 교인들에게 심적인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속셈으로는 세상적인 한을 품고 왔는데 목회자가 눈치없이 그들에게 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라고 부축하면 교인들은 이중고를 겪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가 부흥되려면 아예 성경을 멀리하고 온갖 간증을 줄지어 구색을 맞추어서 전하면, 교인들은 희망을 갖습니다.
“아, 나는 저 사람들처럼 그대로 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겠구나”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목사는 신이 나서 다음과 같이 맞짱구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하늘 나라에 못갑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영혼은 일단 주의 사자인 저에게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시킨대로만 하시면 여러분은 반드시 소원 성취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믿는 자 되기를 원하십니다. 안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된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소망이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걸고 소원을 아뢰기를 손꼽아 기다리십니다. 믿고 간곡히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여러분 소원은 하나님의 자기 명예와 영광을 걸고 책임지고 이루어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살아계심을 여러분을 통해서 기적으로 나타나기를 스스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망설리지 마시고 뭐든지 하나님에게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매달리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방종교 성직자들은 오늘날 한국 땅 뿐만 아니라 유다 나라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버린 자들이 소위 자신들을 지칭해서 말하기를 ‘산 자’라고 합니다. 그 산 자들이 자체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산 자보다 한계가 그 넓은 자들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들은 죽은 자들에게서 찾습니다. 죽은 혼백에게 물으면 미래나 장래에 대해서 더 명확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발상이 과연 무엇이 근거해서 나올 수 있는 겁니까? 이미 죽은 자들, 즉 죽음 이후의 세계로 진입한 자들은 아직 죽음이라는 경험을 하지 못한 자보다 이 세상 미래에 대해서 더 길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이런 근거없이 소리를 하는가 하면 바로, 제멋대로 지껄이는 점장이들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점장이들이 이 세상에서 무슨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곡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마음 속에 원하는 것을 성경 자체에서 찾을 수 없으니 그들은 점장이에게 가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로지 말씀대로만 세계를 진행시키십니다. 이 세상은 곧 하나님의 자기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답답해하는 문제를 큰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이 만들어 나가시는 역사는 작은 문제로 여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는 그 길 가에서 두 장사치들이 서로 물건을 팔겠다고 아웅다웅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진정 무엇이 큰 문제이고 무엇이 작은 문제인지를 분간치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피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개인적인 답답한 일로 인해 예수님이 하신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교회 성직자들도 이런 교인들의 행태에 호응하여 교회에서 세상적인 것이 더 크고 중요한 문제라고 부각을 시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지닌 십자가는 참으로 별 볼일없이 시시하고 무시당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사람들의 답답증을 해소하는 단체가 되어 버리게 되고 그런 교회를 보고 있는 피흘리신 예수님께서 답답해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그 교회에서 추방시켜 버리고 맙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치는 자들의 소리를 거부하는 겁니다.
“당신의 말이 옳지만 교회가 부흥되지 아니하면 그런 좋은 복음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하면서 복음을 추방시켜 버립니다. 이런 행태가 곧 바로 적그리스도요 살아있는 악마의 종들입니다. 즉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는지를 그들은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이점을 분명히 알게해 주어서, 전에는 큰 일처럼 느껴지던 것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알고 부터는 큰 일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답답증은 세상적인 향락을 제대로 못 따라가서 발생되는 답답증으로 확산됩니다. 전에는 얼마든지 감사했던 일들에 대해서도 남들이 좀 더 큰 것을 갖게 되면 금방 답답증을 느끼면서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한 하나님을 저주하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아주 연약하게 만들어서 세상 속에서 쉽게 밀려 넘어지는 방식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것은 지옥가는 자들의 마음 속에 이미 하나님을 저주할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음을 까밝히는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답답증이 하나님의 복음의 훼방꾼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이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