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8:16-18 /법을 감추라
이사야 8:16-18 /법을 감추라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법을 감추라
2006년 3월 8일 본문 말씀: 이사야 8:16-18
(사 8: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사 8:17)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사 8: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유다 나라 사람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민족에게 맥을 못추느냐?”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이 본인들을 더욱 완전케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완벽하게 죄인이라는 점을 더욱 더 완전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점도 모르고 마치 율법에서 무슨 능력이라도 나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에 대해서 분열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기에 인간은 쉬지않고 악에서부터 시작해서 선을 추구하게 됩니다. 악을 버리고 선으로 질주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이 더욱더 크게 의식되는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기어이 선에 집요하게 다가서는 본능 외에는 다른 삶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만이 자신이 절대적인 신이 되고 존재가 되는 유일한 근거라고 여깁니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악에서 점차 멀어지고 선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은 더욱 큰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데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난 뒤에 도망쳤고, 숨었고, 부끄러워했고, 두려워했고. 가리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오늘날 21세기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 앞에서 도망치고 숨고 하면서도, 숨어서 하는 짓들은, “보다 완전해지면 하나님께서 복주시겠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완전함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하십니다. 즉 ‘완전’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율법도 우리의 완전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를 더욱 은혜되기 위해서 주신 택한 자들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9-22에 보면,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의 등장은 중보자의 등장과 연관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율법을 몇 개 더 지켜서 지금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범법함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지 전보다 우리가 더 선한 자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마치 율법은 우리를 낫게 하는 보약이나 조제약 같은 것이 아니라 엑스레이 사진과 같습니다. 멀쩡한 우리도 율법 앞에서는 여지없이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1초마다 한번씩 외워보세요.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 수 없음을 1초마다 한 번씩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먼저 우리에게 깔아놓으시므로서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중보자가 오시기를 고대하게 하셨습니다.
그 중보자는 우리의 율법 지키는 실력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하실 일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0:16-19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얻은 능력의 대단함을 아예 우리 속에 심어놓았습니다.
그 심어놓으신 효과는 이러합니다.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중보자가 하신 일에 관심을 두고 나와야 합니다. 다른 성도들의 완전함을 구경하기 위해서 와서는 아니됩니다. 자신의 완전함으로 하나님께서 나아가려는 자는 필히 아담처럼 하나님 앞에서 변명이나 늘어놓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봉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차원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7:6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을 쥐고 있다면 그런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라 개나 돼지에 해당되는 무가치한 인간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복음이란 마치 봉인된 율법과 같은 것입니다. ‘낯을 가리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오심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고 이사야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언약과 맹세를 스스로 이루어나가시면서 그 결과를 은혜로서 자기 백성에게 입혀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참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증인으로 나타나는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즉 자신이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사랑이란 아무리 받아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끝없이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완전함이란 늘 자신의 실수와 오류와 모자람으로 인해 슬퍼지고 낙담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죄와 불법을 용서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부족과 실수나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만끽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비로소 율법이 봉해져야 하는 의미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 복음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완전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심어주신 사랑을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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