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26 : 1- 4 (구원의 성)
사 26 : 1- 4 (구원의 성)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51)
본문 : 이사야 26장 1-4절
제목 : 구원의 성
일시 : 2006년 11월 29일
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이사야-2005/064강-사26장,1-4,(구원의,성)-isa061129.hwp
이근호
06-11-29 21:02
구원의 성
2006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이사야 26:1-4
(사 26: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사 26: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사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집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거주용입니다. 피곤한 육체를 쉬기 위한 용도로서 지상 공간에 만드는 것이 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피곤할 이유도 없으시고, 특정 공간에만 제한적으로 묶어있을 필요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성만을 짓고 곽을 삼으시는 겁니까?
우선 사람들이 하나님을 포섭하여 붙들어놓기 위해서 신전이나 신당을 만드는데 이것이 과연 어떤 아이디어의 소산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즉 사람 쪽에서 신을 위해 집이나 성을 짓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요? 옛날부터 무당들이나 성직자들은, 신을 자기 권하 내에 붙잡아 놓기 위해 가진 정성으로 다 기우립니다.
즉 남들보다 더 많은 정성과 성의를 신에게 바치므로서, 신으로부터 관심을 이끌어 자기에게 더 유력하게 쏠리게 하는 수법을 사용합니다. 정성드린 만큼 신은 보답하다는 원리를 사람들은 잊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성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신을 독점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특정 공간에 신을 부르는 그림이나 향불이나 화려한 색채의 구조물을 건립해놓고서는 정성을 올릴 때마다 신께서 나타나셔서, “무엇을 해줄꼬?”라고 응답이 성사되는 관계를 사람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정성에 의해서 조종 받는 신만을 사람들은 창안하고 그런 신의 인기는 역사를 뛰어넘으면서 지속됩니다.
과연 예수님도 그런 분일까요? 요한복음 13:36-38에 보면,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내놓고서까지 주님이 가신 곳에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단호하게, ‘불가능하다’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돈이나 정성이나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바친다고해도 참된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이로서 인간 쪽에서 시도하는 그 무엇도 하나님과 함께 동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현 실정입니다. 인간으로서 영원히 살고 싶어, 천국을 운운하는 것조차 실제 현실을 모르는데서 나온 환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과 함께 살지 않을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 만드시는 집이 있습니다. 이 집은 인간들이 목숨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만들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칼로서 자기 몸을 자해해도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왜 인간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창고 같은데서 밖에서 큰 자물쇠로 문을 잠가놓으면 안에서 아무리 열려고해도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갈라디아서 3:22에 보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28-30에 보면, 천국이 임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철저하게 누구에게 갇혀 있는 꼴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식으로 동거하고 영원히 사는 집을 만드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결정 할 사항입니다. 일단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완성되며, 그 완성되었다는 표시로 또 누군가가 오시는데 그 분은 예수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주님께서 성령께서 사람에게 보내신다는 말은. 아무리 천국이 만들어져도 주님 쪽에서 찾지 아니하면서 여전히 천국 밖의 인물로 그냥 남는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4:16-18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동거한 적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과 동거했을까요? 배타적으로 동거했습니다. ‘배타적’이라면 아예 동거하지 말아야 하는데 ‘배타적’이면서 기어이 동거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성막 입구에서 이스라엘을 만날 때 ‘배타적’으로 전 백성을 물리치시고 오직 모세만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수해야 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은 배타적으로 하나님께서 오직 모세에게만 전달했고, 그 모세는 그제사 모든 백성에게 알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에 관한 법은 배타적으로 오직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동거가 내부적으로 엄연히 거룩과 비거룩을 분명히 하시면서 동거하고 계시는 양상입니다. 모세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 중보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모세가 빠진다면 이스라엘 자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중보자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죽고 난 뒤에도 모세가 받은 언약은 그 자체로서 생생하게 살아있어 중보자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보자 역할을 해야 될 제사장들이 제대로 말씀에 순종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새로운 동거 방식을 실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가운데 왕을 세워서 그 왕이 백성의 모든 운명을 대신해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모세때처럼 단순히 말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왕이 되는 자가 다 수행하므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동거하는 방식이 다윗 왕때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전에 함께 계시어 축복을 내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 약속에 따른 왕이 성취할 법이란 다름 아닌, 백성들이 지은 죄에 해당되는 저주를 대신 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53:4-6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왕이 그리스도요 메사야이십니다. 이로서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성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메시야 되시는 분의 홀로 이루신 공로와 성과를 온 우주에 증인으로 드러내기 위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은 집이 아니라 친히 하나님이 지은 집에 초대받은 것을 영원한 행복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