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16-26 /사치
사치
2005년 11월 30일 본문 말씀: 이사야 3:16-26
3: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3: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3:18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장식과
3:19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3:20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3:21 지환과 코 고리와
3:22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3:23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3: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3:25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3:26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추구하는 것과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인간들이 좋은 것을 선호하는 본능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이런 인간의 본색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낱낱이 들추어내면서 진행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을 못 본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각시키면서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해서 우리 인간들이, ‘신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면뿐만아니라 ‘내가 누군가’도 아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임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체도 덩달아 알게 됩니다.
쉬운 예로,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면서 우리 인간을 그냥 구경꾼으로 남겨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작업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달아 죄를 쏟아내는 죄인인가 하는 점도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유다 나라의 전쟁이 임하는 일을 예언하면서 그 당시 여성들이 얼뚱한 곳에 신경 쓰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나타냅니다. 사회에서 발생되는 부가 어디에 소비되는 가를 즉각적으로 잘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여성들의 사치입니다. 사치를 하는 여성들의 행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벌리시는 일과 확실한 대조를 이루시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처럼 사치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은 내부적으로 무한히 결핍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뭔가 가지게 되면 그것은 또한 ‘허망’이라는 긴 그림자도 같이 끌어들이게 됩니다. 즉 뭔가 있다는 그것이 새로운 부족함을 낳습니다. 차라리 갖지 않았더라면 그것으로 인해 부족한 것도 미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뭔가를 가지고 나니, 그것으로 인해 새로운 불만족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태를 이사야 선지자는 넓고, 그리고 길게, 그리고 멀리 보는 안목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당장 코 앞에 있는 결핍에만 매달리는 안목이 아니라 왜 인간에게 그런 결핍이 발생되느냐 하는 것까지 이사야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주님들이 과연 이사야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수긍했을까요?
아마 이사야에게 대단히 분노했을 것입니다. 즉 “당신도 이런 좋은 물건을 가져봐라. 그러면 이런 물건들로 치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과 만족을 안겨다 주는지 실감할 것이다. 선지자 당신은 아직 이런 귀한 물품들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괜히 시기 나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고 따져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선지자가 인생사를 길게 보고, 넓게 보고, 깊이보고, 높이 보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가져서는 아니되는 안목입니까? 죄짓는 일입니까? 제가 보기에 도리어 자기 코 앞에 있는 순간에만 만족하려고 애쓰는 그런 태도가 죄악된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가 고급스러운 물품을 갖지 못하고 안달이 나고 화가 나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차이점을 계속 말씀하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껍질을 벗겨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덮어씌우고, 꾸미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충돌이 어디서부터 일어난 것일까요? 창세기 3:7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놀랍게도 ‘눈이 밝아’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인간은 죄를 짓고 난 뒤에 비로소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전까지는 눈이 밝지를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처음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지금은 극히 당연해 보이는 인생관인, ‘네 인생은 너 하기 나름이다’라는 인생관은 죄를 짓고 난 뒤에나 합리화된 인위적인 인생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인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책임 하에 존재해야만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즉 그 때는 구태여 눈을 밝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범하고 난 뒤 부터는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을 자기 관리 하에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뭔가 부족한 낌새를 채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해서 발생된 인생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인간형이라는 어디까지 인위적이요 인공적인 인생일 뿐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이런 혜택을 베푸시는데 그것이 바로 ‘멸망’과 ‘전쟁’을 통해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모든 허울을 벗겨버리는 전략으로 나서십니다. 즉 아무리 예쁘게 머리를 했어도 대머리되게 해버린다는 겁니다. 아무리 고운 얼굴을 하고 거리에 나서도 상처투성이의 얼굴로 되게 한다는 겁니다. 화려한 옷을 입어도 그 옷은 장례식 옷으로 바뀌게 하신답니다.
물론 이것도 자기 백성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아마 이방민족 같으면 그냥 내러버려 두십니다. 멸망하든지 말든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하시겠다고 나선 민족이기에 전쟁을 통해서 인위적은 자기 치장을 벗겨놓는 것입니다.
신명기 8:12-14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면 되지 않겠냐 하지만 하나님의 이 말씀 취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잘 살든지 못살든지 간에 정작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실 때는, ‘붙여주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관라하심을 알려주십니다.
광야에서의 만나도 이와 같은 취지에서 제공하신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키우시는 그 언약과 약속을 잊지 않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보다 넓게 보고, 길게 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